지긋지긋한 말이 있었다.
우리의 닿음이 깊어질 때면 내 어깨를 붙들고 내뱉던 전원우의 실낱같은 희망. 어깨를 쥔 손은 언제나 눅눅하게 젖어있었고, 까만 눈동자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나는 그 무거운 매달림을 견디지 못해 늘 마지못해 수긍했고, 전원우는 그제서야 모든 걸 이어나갔다. 전원우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비겁한 회피이고, 의미없는 자기위로라는 걸. 그럼에도 그런 한심함의 무게를 빌려야 할 만큼 어리다는 이야기다. 그래, 우린 어리고, 전원우는 멍청하기까지 했다.
매미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해를 거르지 않고 돌아왔다. 시원한 책상에 볼을 대고 교실을 쓸고나가는 한 무리의 호르몬 덩어리들을 바라봤다. 속으로는 별 병신같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를테면 저 지나가는 튼실한 허벅지들이나 팔뚝, 땀이 흐르는 목선…. 고이는 침에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교실에는 나와 윤정한, 그리고 몇몇 청소당번들만이 남아있었다. 매미들은 여전히 우렁차다. 쓸데없이 성실해, 섹스하고 죽을 것들이. 궁시렁대며 가방을 챙겨든 윤정한이 내 책상 앞에 멈춰섰다. 아, 나도 섹스하다 죽고싶다.
"안 가?"
"가야지."
"진짜 맨날 늦으면 앞으로 혼자 간다?"
"어차피 이제 방학인데."
"보충있잖아."
"아... 너무 싫어…"
"빨리 가방이나 싸."
재촉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윤정한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하니 발로 책상을 툭툭 찼다. 머리가 흔들흔들, 아, 윤정한 잘 생겼다. 정신이 멍해 허허실실 웃음만 비집고 나온다. 결국 평소처럼 윤정한은 내 가방을 챙겼다. 홍지수!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뒷문에서 최승철이 나를 불렀다. 허벅지가 괜찮은 최승철. 절로 침이 고인다. 점심시간마다 꼬박꼬박 운동장을 찾는 것은 거의 최승철 때문이다. 빗자루를 든 손을 타고 의식의 흐름대로 핏줄을 감상했다. 좋네...
"누가 너 찾는데?"
"누가, 얘 친구 나밖에 없는거 알잖아."
"아닌데. 친구 많은데."
"2학년, 전원우."
"아, 또 전원우야?"
헉, 나 정말 친구 윤정한 밖에 없나보다. 전원우는 친구가 아니니까. 심각하네. 투덜대는 윤정한에게서 가방을 건네들었다. 뒷문을 나와 에어컨 바람에서 벗어났다. 와 씨, 진짜 더워! 나오자마자 땀이 솟아날 것 같아 단추를 끄르며 멀뚱히 서있는 전원우에게 다가갔다. 이 더운 날씨에 목 끝까지 단추를 꼭꼭 잠구고도 땀 한방울 없이 정갈하다. 역시 전원우, 미래의 목사님! 동그란 안경 너머 긴 눈과 마주치자 윤정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얘는 왜 이렇게 전원우를 싫어할까. 자기랑 반대라서? 활짝 벌어젖혀진 윤정한의 교복이 주인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왜 이렇게 늦어."
"음, 더워서."
"같이 갈 수 있어?"
"정한아, 어…"
"뭘 또 물어. 안된다 해도 같이 갈거면서. 더우니까 빨리 가."
망설이는 내 등을 미는 손이 신경질적이다. 윤정한이 전원우를 싫어한게 먼저일까, 내가 전원우를 우리 하교길에 끼워넣은게 먼저일까. 전자였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윤정한이 전원우를 싫어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학교를 벗어나면 뜨거운 길바닥이 발을 데운다. 금세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윤정한은 슈퍼에서 멈춰 사과맛 쭈쭈바와, 설레임 하나를 샀다. 밖으로 나오다가 짜증을 내며 설레임 하나를 더 계산하곤 익숙하게 내게는 쭈쭈바, 전원우에게는 설레임을 넘겼다.
츤데레.
내 한마디에 헛웃음을 뱉고 파란 뚜껑을 따 길거리에 버리자 쏜살같이 주워 휴지통에 넣은 전원우를 노려보는 것이 종종 찾아오는 셋의 하교길. 곧 찾아오는 갈림길에서 윤정한과 헤어지고, 전원우는 별 말 없이 내 뒤를 쫓아온다. 땀냄새가 날 것 같아 거리를 둬도 긴다리로 휘적휘적 따라 붙는다. 편안한 침묵. 발소리가 커다랗다.
둘이라고 별로 다를 건 없다. 어제와 똑같이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을 틀고, 옷을 갈아입고, 짧은 샤워를 마친다. 전원우도 자연스럽게 옷을 꺼내 입었다. 달라진 건 아이스티 잔의 갯수와 컴퓨터를 키는 대신 꺼낸 플스 뿐이다. 냉기가 돌지 않아 그 새 또 등에서 땀이 샜다. 아이스티에 얼음을 둥둥 띄워 전원우의 옆에 앉았다.
"아, 진짜 더워. 너 더위 안타는 거 진짜 복받은 줄 알아."
"그 대신 추위를 많이 타잖아. 그거대로 괴로워."
"난 추위도 많이타는데."
"더위가 낫지. 더우면 벗으면 되잖아."
"지금 나 벗으라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뜨며 티셔츠를 팔락거리자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 귀여워. 발개진 귓바퀴가 눈에 들어오자 침대 위를 방방 뛰고 싶어졌다.
시덥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게임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창밖에서 붉은 빛이 들어왔다. 요란하게도 지는 해를 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게임화면이 꺼져있다. 컨트롤러가 쥐어진 내 손이 황망하게 비워지고 입 안을 굴러다니던 얼음도 다 녹아 사라졌다. 아주 일상적이게,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나는 눈을 감고, 전원우의 차가운 손이 볼을 감싼다. 동그란 안경은 벗은지 오래다. 코 끝이 닿을 듯 말 듯 망설이다 포개지는 입술은 조금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어번 뻐끔거리고 떨어졌다, 다시 조금 더 강하게 부딪혀오는 입술에 방은 금세 질척한 소리로 가득찼다. 어정쩡하게 이 위에 걸쳐있는 전원우의 혀를 내 입 속으로 이끌어 얽고, 단단한 이를 훑는다. 점점 내 몸을 누르 듯이 다가오는 마른 몸에 바닥에 팔 뒤꿈치가 닿았다. 지금까지 만난 애들은 전부 키스 중에 날 찍어누르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마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겠지. 가끔 다정하게 뒷머리를 받쳐주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전원우 또래 애새끼들은 대부분이 그랬다. 그 중에서도 전원우는 독보적이다. 정도도 그렇지만. 그렇게 나를 밀어대며 침대로 안착시키고 바지를 벗기는 놈들과는 달리 이 멍청이는 그 다음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갑자기 혀의 끈적한 움직임이 멈췄다. 전원우의 브레이크가 또 발동했다. 반 쯤 누운 채로 몸을 일으키는 전원우를 바라봤다. 최대한 짜증이 담긴 눈으로. 그래봤자 신경도 안쓰겠지만 말이다. 반들반들한 입술을 닦아낸 전원우가 고개를 들었다.
"나, 호모포비아야."
그래, 이거. 다른 놈이 키스하다 말고 갑자기 포비아 선언을 한다면 난 아무도 모르는 내 지랄스러움을 모두 모아서 따다 줄 수 있을텐데. 안타깝게도 난 전원우의 말에 늘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전원우가 저 말을 할 때면 날카롭게 째진 눈이 길잃은 강아지처럼 촉 처지는데, 나는 그게 못 견디게 안쓰럽기 때문이다. 그래, 이건 전원우 잘못이 아니다. 다 독실한 종교인이시자 대단한 세뇌교육자이신 쟤의 부모님 잘못이지.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뱉고 다시 전원우의 뒷목을 잡았다.
"나도 알아."
"정말로..."
"알았으니까 하던 거 계속할래?"
어린 눈. 흔들리는 갈색 동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여느 때와 같이 나의 박력있는 입술 박치기로 2라운드가 시작된다.
오늘도 놀이터 앞까지. 전원우의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다 발을 멈췄다. 계속 걸어가던 전원우가 그제야 허전함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으로 들어간 전원우를 보고 있자니 조금 슬퍼졌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무인도에 홀로 서 있는 듯 했다. 수많은 평범함 속에 이상하게 돋아있다. 눈치 없기로 유명한 전원우가 내 서글퍼진 기분은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먼저 다가오는 법이 없는 자칭 호모포비아를 향해 걸었다. 다행인 건 전원우는 나를 밀쳐내는 법이 없다는 거였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단정한 얼굴에 심장이 울렸다. 새까맣게 변한 여름밤이 노란 불빛에 갈라지는 게 느껴질 때 쯤 입술이 떨어진다. 곧바로 뒤를 돌아 갈 줄 알았던 전원우가 손을 잡아왔다. 진중한 눈을 마주하니 괜한 감정이 고개를 비집고 나온다. 혹시, 혹시... 볼이 달지 않도록 입술을 꾹 물었다.
"형."
무거운 목소리에 손 끝이 차갑게 굳는다. 세게 짓누른 입술을 살짝 핥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머리가 어질했다.
"우리 이거 그만하자."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전원우의 그 말을 들을 때면 늘 어딘가 아파오곤 했다. 나, 호모포비아야. 전원우와 처음 키스한 날, 전원우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그대로 돌려보낸 뒤 베개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외로웠다. 자기 세상에서 나를 똑 떼어버리는 말이었다. 게이 홍지수는 전원우의 감은 눈 앞에서 손을 휘저어 봤자 메마른 무인도를 빠져나랄 수 없었다. 어설픈 회피는 어설픈 상처를 남겼다. 어설픈 상처를 어설프게 동여매고 다시 입술을 뻐끔댈 수 밖에 없었다.
복잡하고 거지같은 인생에서 단언할 수 있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원우는 절대 포비아가 아니라는 것, 하나는 방학 중 보충은 인생을 더욱 거지같이 만든 다는 것. 묵직해진 머리를 이고 공격적으로 내 가방을 싸는 윤정한을 바라봤다. 이미 교실은 텅 비어 오후의 뜨거운 햇살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꼬질꼬질한 커튼이 나부대는게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자 윤정한의 까만 티셔츠가 보이고 어제 어둠 속 가로등 아래서의 키스가 생각났다. 우리 이거 그만하자.
누구 마음대로.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결국 그 날은 전원우의 손을 뿌리치고 달렸다. 간간히 오던 연락도 씹었다. 웃기게도 상처를 받은 거였다. 시작하지도 않은 관계에 혼자 이입해서는. 책상 바닥에 이마를 부볐다.
"너 진짜 이제 나 만만해서 이러지?"
"정한아."
"왜."
"키스할래?"
"또 무슨 일인데."
"몰라. 정한아, 키스해줘."
"어휴, 너 이럴 때 진짜 귀찮은 거 알지?"
"얼른, 빨리..."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감았다. 윤정한의 손이 의자를 쥐는게 느껴지고, 책상에 단단하게 받쳐진 팔을 쥐었다. 느릿하게 부벼지는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서둘러 마주 혀를 놀리자 달래듯 움직이는 게 부드러웠다. 숨이 모자라지 않게 천천히 입술을 뗐다 붙였다를 반복했다. 과분할 정도로 상냥한 움직임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위로받고 싶을 때면 늘 이렇게 윤정한을 졸랐다. 이런 사랑스러움은 전원우와의 치열한 입맞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팔을 들어 윤정한의 어깨에 올리자 땀이 살짝 밴 손이 내 뒷목을 감쌌다. 윤정한이 교실 밖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답지않게 쫄았나. 보채 듯 윤정한의 소매를 당겼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갈림길에서 윤정한과 헤어지고, 혼자 집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오묘했다. 울적하면서 산뜻한 기분, 괜히 굴러다니는 깡통을 걷어찼다. 그렇게 노란 깡통만 바라보면서 집 앞에 도착해 고개를 들자 의외의 가슴팍이 나를 반겼다.
"으아, 전원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원우가 고개를 숙였고, 금세 입술이 마주 닿았다. 입술은 평소같이 부드러웠지만 평소보다 훨씬 까슬한 키스였다. 거칠게 혀가 밀려들어와 답지않게 서툰 마중을 나갔다. 자연스럽게 받아주긴 하지만 머릿속은 과부하였다. 그만하자더니?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계속 밀고 들어오는 입맞춤에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널찍한 어깨를 쥐고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허리를 받치고 더 가깝게 다가왔다. 입술이 떨어지자 몰아쉬는 숨소리만 맴돌았다.
허겁지겁 도어락을 해제하고 들어오는 중에도 전원우의 손은 내 허리를 더듬었다. 끈적거리는 피부가 불쾌하지도 않은지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물고 핥아 문을 여는 손이 벌벌 떨렸다.
"좀, 원우야. 나 좀 씻기라도 하면,"
"안 돼."
단호한 대답에 입이 닫혔다. 하복 셔츠 단추를 풀어내려가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어려웠다. 밀어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 무의미한 저항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딱 붙은 채로 현관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다급하게 리모콘을 쥐어 에어컨을 키자 전원우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하자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이런 간질거리는 스킨쉽을 전원우에게 기대해 본 적도 없는데. 괜히 눈가가 뜨끈해졌다.
에어컨을 키길 잘했지. 맨 몸으로 편안히 잠든 전원우를 바라보며 뿌듯함을 만끽했다. 찝찝해진 몸을 씻고 거실로 나와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영화를 봤다. 정신없는 오락영화였다. 주인공이 지나갈 때마다 요란하게 터지는 효과음에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사실 그걸 바라고 튼 영화인 것도 사실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는지 눈을 뜨자 사방이 어두웠다.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 통이 사라지고 에어컨에서는 아까보다 선선한 바람이 돌았다. 급하게 들어간 방에는 텅 빈 침대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복잡했던 마음이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눈물이 나오기엔 준비를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전원우가 누워있던 곳에 코를 박고 질질 이불을 적셨다. 내일 부은 눈을 보고 윤정한이 뭐라고 할까. 엄청 놀려대겠지. 서러움이 배가 되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어둠속에서 찌질한 눈물을 떨구는데 낯선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택밴가. 코를 훌쩍이며 문을 열었다. 요즘은 계속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 같다. 이게 다 전원우 때문이야. 눈가가 시큰했다.
배를 건네받으려 내민 손이 계속 휑했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또 뜻밖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얼굴이었다. 왼쪽 눈이 보랏빛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너, 눈. 눈 왜 그래!"
"나 쫓겨났어. 재워줄 수 있지?"
"왜 쫓겨났어. 어쩌다가."
"나 호몬가 봐."
"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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