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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싸늘한 기운에 원우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밑바닥까지 가라앉은 기분은 날카로운 날씨 덕에 그대로 굳어버려 풀릴 기미도 없었다시동을 거는 손이 몇번이나 엇나갔다차창 너머로 병원을 바라보던 원우는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너무나 익숙해서 화가  지경이었다

     

 다시 연인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원우의 애인이 오랫동안 아파서 몇번이고 병문안을 오는 것은 아니었다그런 순애보적인 회방이 아닌운명원우에게는 저주인 어떠한 운명 때문이었다

     

전원우가 사랑하는 사람은 화를 입는다.

     

우습다우습다 못해 동화스러운 얘기였다원우도 그렇게 생각했다첫사랑에게 천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반장이었던  여자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짝사랑했던 동기가 초기암 판정을 받은 것도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뒤로 썸이든짝사랑이든정말 연애든원우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뒤면 어김없이 불행이 찾아왔다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난 정민마저 병원 신세를 지게됐다원우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얘기할 그런게 어딨어,하고 웃던 정민이 씁쓸하게 정말이네,하고 헛웃음을 날렸다정민의 웃음에 원우는 입술을 깨물었다사과하는 원우를 정민은 차마 보지 못했다이별을 고한  정민이었다

     

"너는 평생 혼자 살아야겠다."

     

원우는 시동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편의점에 들어가 끊었던 담배를 샀다무얼 즐겨 폈었는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아무 이름이나 던저 부르곤 밖으로 나와 곧장 불을 붙였다.

     

대충 고른 담배는 텁텁하고 맛이 없었다

     

     

아픔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시는 타입은 아니었다어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초저녁부터 잠에 빠진 원우는 느닷없이 눈을 떴다시꺼먼 어둠 사이로 확인한 시간은 다섯시를 살짝 넘겼고뻑뻑한 눈은 다시 감길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침대에 걸터앉아 허공만 보던 원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가운 공기가 마지막 남은 잠을 떼어냈다어슴푸레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에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은 원우밖에 없어보였다골목 사이를 걷다 새까만  속으로 들어갔다 육교를 오르기도 했다함부로 정의할  없는 감정이 넘칠  출렁이고 있었다사람이 없는 버스정류장의 불빛을 쫓아 걸었다

     

여섯시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원우는 차가운 정류장 벤치에 앉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을 지켜봤다출근길이 분명한 깔끔한 차림의 여자와 희끗한 머리의 아저씨기대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학생 그리고 반듯하게  있는 마른 몸의 청년 하나통학하는 학생인가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가방이 없는데영양가 없는 고민을 흘려보내던 원우는 뒤늦게 남자가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개를 갸웃하며 웃는 눈을 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시간이 흘렀다점점 곤란해지는 얼굴을 무표정하게 마주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지원우는 남자와 마주보는 얼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코앞까지 가까워진 남자의 앞에서 원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혹시 저한테 할말이라도."

     

원우가 멍한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자는 걱정스럽게 원우를 살폈다저기요괜찮으세요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요란한 소리를 내며 버스가 지나갔다뿌연 가스 사이의 원우는 무력감을 느꼈다.

     

     

생명 사람의 목숨그가  가벼움에 대해 깨달은 것은 겨우 열다섯이  무렵이었다무릎꿇은 상처투성이는  어려움 없이 쏟아지고 조각나고 사라진다그의 손으로 앗아간 생명의 증거는 한차례 비가 쏟아지면 사라질 진한 피비린내종종 바닥을 보며 걸을 때나 돌바닥 틈으로 보이는 말라붙은 핏자국 정도였다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럼."

     

 미소를 짓는 대비의 입가로 인자한 주름이 패였다원은 애써 웃음을 띄우며 마주 인사했다가증스러운 여인이다본래 띄던 지혜와 오랜 궁궐 생활로 쌓인 처세술은 어린 왕의 목을 조르곤 했다얼추 십년 정도 되는 시간동안 원이 어떤 욕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이정도 였다경차관 정도의 취급으로 자꾸만 원을  밖으로 돌리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붉은 난여에 올라탄 원은 한숨을 쉬었다욕심은 없었지만 신경쓸 것이 너무도 많았다대비의  밖에 나면 아차하는 사이에 절명이 가까워지는 꼴을 너무 많이  탓이었다

     

왕의 것이라고 하기엔 단촐한 행렬을 군중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이정도 규모야 하루걸러 하루 보는 양반들의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원도 익숙하게 요란한 시장바닥을 구경했다사람사는   똑같다는데원은 쉽게  말의 진위를 파악하지 못한다싸구려 기름 냄새가 풍기는 거리는 원에게 늘상 어색했다왁자하게 떠드는 사람들도아이들이 지나가면 훅하고 올라오는 흙먼지마저 원이 공감하기엔 어려운 것들이었다그렇다고 새롭거나 흥미롭지도 않았다이런 거리로 내몰린 것은 궐에서의 원의 입지가 좁다는 반증이었다

     

다음에는 말을 타고 나와볼까태평한 생각을 하며 눈을 끔뻑였다정말이지 별거없는 순시가   같다는 예상을 하는 순간 원우의 눈으로 벚꽃이 들어온다

     

"멈추어라!"

     

원우의 외침에 순식간에 행진이 정지했다겸사복장 순영이 말에서 내려 놀란 얼굴로 난여를 살폈다웬만한 일로는 순시 중에 입을 열지 않는 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순영의 물음에도 조용히 원은 순영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조그만 얼굴이 뭐가 그리도 환한지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겼다내리깐 눈은 가느다란 속눈썹으로 덮여 사르르 움직이고 덩달아 입꼬리도 묘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다너무도 정적인 웃음에 원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어딘가익숙한 듯도 했다.

     

"전하전하."

" 그러느냐."

"정신 차리십시오무슨 일이십니까."

"저기 사람."

     

없다잠깐 순영에게 시선을 돌린 사이에 원의 넋을 빼놓은 여인이 사라졌다원을 보는 순영은 의아한 표정이었다작게 미간을 좁힌 원이 입을 달싹댔지만 방도가 없었다결국은 순영을 물리고 다시 행렬을 이어나갔다지루한 노정동안 사라진 얼굴은 원의 머릿속에서 잔뜩 굴러다녔다온통 유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숫보드라운 얼굴어디서 봤던 것인지원은 입술과 함께 기억을 곱씹는다

     

     

짧게 끝날리가 없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원의 일행은  묵는 기방인 청연방으로 향했다고생한 말단들이 가장 풀어질  있는 공간이기도 했고덕분에 원을 향한 감시가 줄어드는 공간이기도 했다술냄새와 옅은 향기가 방으로 흘러들어오면 원은 눈을 뜨고 조용히 발을 옮겼다시끌벅적한 창호지 너머는 무시하고 향하는 곳은 적막한 쪽마루였다 곳에 앉아있노라면 새까만 밤이 무색하게 기분이 화해지곤 했다넓게 펼쳐진 연못에 달이고 별이고 흘러가며 원과 장난을 치고  따사로와진 밤공기가 어깨를 감싸주는 것이다

     

바쁘지 않을 적이면 원을 안쓰럽게 보는 행수와 담소를 나눌 수도 있었다오늘은 날이 아닌가행수의 털털한 위로가 없는 밤은 시원섭섭하다몸을 젖히고 새하얀 달을 올려다보는 원은  어느때보다 편안했다아예 등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코끝으로 기방으로 이어진 강물냄새와 텁텁한 흙냄새가 났다 사이로 스며든 화사하고 은은한 향기낯설다원우는 눈을 떴다방금 전과 다른 풍경하얀 달이 아닌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한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바람에 흩날린 온기가 모여 봄이 되고봄은 더위를 뒤집어 쓰는 시기가  것이다겨울의 끝물새벽 버스정류장에서  무거운 눈으로 지수를 붙잡은 원우 덕에 지수는 타야할 버스를 세번 정도 보내버렸고원우는 멍청하게 눈을 끔벅이며 지수를 카페로 인도했다얼떨결에 생겨버린 인연에 지수는 당황스러웠지만 늘상 짓는 미소만 지었다자신의 행동에 영문을 모르던 원우는 그런 지수에   없는 당위성을 얻는 기분이 들었다

     

둘은 어질어질 연락을 이어나갔다불분명한 목적으로 성사된 만남들은 성공적이었다사르르 웃는 지수를 보며 원우는 분명히 만족감과 설렘그리고 왠지 모를 그리움마저 느꼈다애써 외면하는 중이었다남자니까사랑은 아닐 것이다 막힌 편견은 원우의 자기 위안을 도왔다한밤  지수의 휴대폰에서 걸려온 전화만 아니었더라면 외면을 지속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지수도 원우와 마찬가지로 술을 즐기지 않았다그런 지수가 술을 먹고 뻗었다하는 이야기는 느릿한 원우마저 달리게 했다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주점은 옅은 소란이 묻어있었다주위를 둘러보며 지수를 찾는 원우에게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원우씨여기."

     

지수의 친구 아니랄까봐웃는게 환한 남자가 아는체를 했다남자의 건너편에는 테이블에 엎어진 지수와 그를 둘러싼 서넛의 무리가 있었다무리를 제치고 지수를 업은 원우가 간단한 목례를 끝으로 가게를 나왔다초면에 굳은 표정만 보였지만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지수였다다행히 지수는 원우의 등에 몸을 늘어뜨린채 미동도 없었다

     

마른 몸이 깨나 무게가 나갔다집에 도착한 원우는 땀까지 뻘뻘 흘렸다조심스레 침대에 지수를 올려놓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까지 확인했다일단은  젖은 몸을 씻어야 했다.

     

 자신을 불렀을까 대한 의문은 풀린지 오래였다원우에게 업히고도 몇번이나 원우의 이름을 웅얼거렸으니잠금도 걸려있지 않은 지수의 휴대폰에서 원우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그럼지수는  원우의 이름을 되뇌였을까이상하게 실소가 나왔다기분이 좋은건가이상하게 녹아내리는 마음에 원우는 수도꼭지를 돌렸다얼굴로 흐르는 찬물을 거칠게 쓸어내렸다이래서는 안된다코끝으로 싸한 병원의 향이 스치는  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앞으로 검은 인영이 발을 멈췄다작게 소리를 내자 얕은 어둠 속에서 갓끈을 묶던 원이 문을 쳐다봤다익숙한 기척에 다시 갓끈으로 신경을 돌린다.

     

"무슨 일인가겸사복장."

" 됩니다."

     

뻔하다원은 짧게 혀를 차고 대꾸했다

 

"잠시 뿐이다어차피 너도 동행할  아니냐별일 없게 하겠다."

"그래도  됩니다."

     

단호한 순영의 태도에 원은 헛웃음을 쳤다흑립을 눌러썼다평범한 양반처럼 도포까지  갖춰입은 원우가 순영을 향해 돌아봤다날카롭게 굳어진 얼굴이 일순 움찔한다얼굴만  굳히면  말랑한 친군데매끈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다.

     

"권순영."

"야이 된다니까?"

"오늘따라 심하네."

"애초에 이랬어야 했어."

     

다시 단단해진 표정은 풀어질 생각이 없다 먹혀원은 노선을 변경했다한숨을 쉬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순영은 치여사는 왕을 불쌍하게 바라보곤 했다.  

     

"순영아한번만 부탁하자."

"-마지막이야."

     

원이 조용하게 미소를 지었다친구 좋다는게 뭐냐니아무것도 없다순영이 투덜거리며 나가는 길을  역시 발소리를 죽여 따랐다

     

     

문이라고 하기엔 허름한 구멍을 지나자 들뜬 기운이 감돌았다노랫소리와 가야금 소리히히덕거리며 잔뜩 섞여 노니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원은 빛이 퍼지는 방향으로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은 차가운 뒤뜰강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가볍게 귓가를 두드렸다어느새 순영은  멀리 아름드리 나무 아래 걸터 앉아있었다

     

 너머를 바라보는 동그란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결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금새 고개를 들어 소복한 웃음을 쌓는다달빛에 드러나는 윤곽이 부드러웠다원도 엉덩이를 대고 앉아 조금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허공을 가르며 장난스레 움직이는 다리가 멈췄다.

     

"웬일로 먼저 손을 잡으십니까."

"그러는 홍은 웬일로 신이  보입니다."

"술을 조금마셨더니기분이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말투가 나긋나긋 늘어지고 있었다조금이 아닌  같은데허허 웃으며 얼굴을 들여다 보니 하얀 달빛을 받은  치고 얼굴이 붉었다맞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볼을 쓰다듬으려다 다시 강가로 눈을 돌리는 얼굴에 머쓱이 손을 내렸다.

     

홍은  이런 식이었다온통 비밀투성이에 다가오는 모든 것을 가볍게 밀어냈다그러면서 짓는 웃음이 얼마나 상냥한지 밀려난지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감싸는데에 능한 사람이었다남을 감싸안는 동시에 자신을  감싸 몸을 숨겼다닿을  없었다

그럼에도  몇꺼풀에 비밀에 하나하나 손을 대고 싶어졌다그렇게 만드는  역시 홍의 재주였다원은 느리게 손을 펼쳐 달아오른 볼을 감쌌다왠지 먹먹해지는 목에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입을 맞춰도 되겠소."

     

말없이 깜빡이는 눈에 원은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원이 뱉은 말의 이해가 끝났는지 홍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 결국 끄집어낸 말에 원은 탄식을 했다.

     

"알고 계실 수도 있지만남자입니다."

"-무슨 소리오."

"당연히 아실  알아서-."

     

불안한  흔들리는 눈에 원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딱히 거절의 말은 아니라는 것을 위안 삼아야 하는 것일까원은 어느새 깍지가 풀린 나머지 손을 들어 홍의 다른  볼을 감쌌다

홍이 다른 판단을  새도 없이 입술이 마주쳤다부드럽게 부벼지다 떨어지고 다시 맞붙는다.

     

완전히 붉어진  얼굴이 멀어지자 원은 드디어 웃음을 터트렸다영문도 모르고 원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원이 낮은 웃음을 멈추고 홍을 또렷히 마주했다

     

" 커다란 손부터 가려야 여인이라 생각할  아니냐."

"-."

"다른 데서는 목소리 때문에 말도  안하는  같더니  앞에서는 말도  하고."

"갑자기입을 맞추신다기에."

     

민망한  고개를   손안에  떨어트리고 중얼거렸다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원까지 덩달아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괜히 목을 만지작거리며 큼큼거친 소리를 냈다.

     

사위가 조용한  알았는데의외로 멀리서 울리는 소음도 섞여 있었다긴장 섞인 집중을 풀자 풀벌레 소리도 들렸다마음이 느긋해졌다홍의 허술한 모습을 보니 드디어 홍이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우습지만홍의 투명한 장막이 조금 얇아진 기분이었다말없이 다시 손을 잡았다맞잡은 손에 힘을  원이 전에 없던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감미롭게 퍼지는 캐논 변주곡핸드폰 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가 중요한 연락을 놓친 뒤로 원우는 최대한 시끄럽지 않은 음악에 지수 전용 벨소리를 맡겼다카톡 알림음은 깜찍한 까톡-에서 피아노의 미플랫그러니까 가장 거슬리지 않는 단음으로 해놓았다 치밀함은 모두 지수의 연락을 단칼에 거절할 배짱이 없다는걸 공통의 이유로 삼았다휴대폰에 '지수형' 뜨는데 어떻게 거절 버튼을 끌고   있겠는가의외의 순애보는 마음도 약한 것이었다

     

처음 연락을 끊은 일주일은 반응이 없었다그저 잠시 바쁘겠거니 하는 태평한 얼굴이 눈에 그려졌다그러다 종종 보내는 카톡에도 원우가 답이 없자  하지도 않는 전화를 걸어댔다자꾸만 울리는 피아노 소리에 원우는 속상하고힘들고기분이 좋았다.

     

지수는  느긋하게 굴었다원우도 겉보기에는 그랬겠지만 지수는 그마저도 신경에 들이지 않는  했다그런 모든게 원우를 안달나게 했고망할 저주에 지수가 발을 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 갑작스레 연락을 끊었을 때도 사실은 지수가 신경쓰지 않으면연락이 끊겼다는  눈치채지 못한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다내심 알아주길 바랬던 것이다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부드러운 선율이 끊기고 얼마 안돼 평범한 벨이 울렸다한창 지수 생각에 넋을 놓고 있던 원우가  생각 없이 폰을 집어들었다액정을 귀에 갖다  순간 지수형이 다른 사람 번호로 건거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튀어올랐고 슬픈 예감은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원우는 얼마  정민을 만났다다행히 정민의 병은 짧게 명을 다했고 정민은 이게  원우가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팔팔해진 얼굴이었다원우가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라 치면 능청스럽게 말을 빼앗으며 되려 수척한 원우의 꼴을 놀려댔다.

     

"   자신을 사랑하게 됐냐나르시시스트?"

     

아이스 커피를 쭉쭉 빨며 한다는 말이 그랬다원우가 헛웃음을 치자 얼굴을 굳혔다

     

"장난 아니고무슨  있어?"

"너까지 아프고 나니까 진짜 혼자 살아야 하나 싶어서."

"글쎄  정도는 있지 않을까 저주 이겨낼 강철 인간."

" 사람 하나 찾자고 다른 사람들 아프게   없잖아."

"그럼 무당 찾아가 볼래사주 ."

"봤어."

     

나지막히 대답하는 원우에 정민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진짜 전원우정민의 흐느낌을 외면하며 안경을 고쳐썼다아닌  해도 꽤나 민망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뭐래."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대."

"그게 무슨 말이야전생?"

"시작이 오래 돼서 인연이 길대엄청 많이 만났다고 나도 다는  알아 들었어."

"너도 어지간히 힘들었나 보다그런   찾아가고."

     

너만 하겠냐마음  걷히지 않은 죄책감은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대충 머리를 만지작 거리며 몸을 늘어트리자 정민이 질문을 덧붙였다.

     

"거기서 전생은  알려줬어그사람 누군지는?"

"."

"그럼  어쩌냐혼자 살아."

     

호탕하게 던지는 말에 다시금 분위기가 유해졌다원우는 웃으면서도 정민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거짓말을   아니지만 진실을 털어놓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전생을 알려주지 않았지만원우의 머릿속에는 희미한 조각이 오래된 기억처럼 떠올랐다.

     

     

마지막은 무슨지나가던 개가 웃겠다순영의 타박에도 원은 청연방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지 않았다대비의 눈총을 피하겠다고  일을 헐레벌떡 끝내는 가벼운 표정에 순영이 제재를 가하는 것도 한계였다

     

원은 본래 밤을 싫어했다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구질구질한 망령 뿐이었다자신이 끊어버린 생에 죄책감을 버린지는 오래 되었지만  틈에 끼인 말라붙은 핏자국 처럼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더욱이 밤의 기억이라면 좋은 일을 찾아볼  없었다.

     

" 밤에 어딜 가시는 겝니까."

     

순영의 몸이 화드득 굳는 것이 보였다살벌한 대비가 궁녀 몇을 거느리고  있었다잠시 정적이 흐르고 입을  것은 원이었다태연함을 가장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밤마실을 가려던  였습니다."

     

표정변화는 없었지만 대비는 원의 대답을 가소롭게 여기고 있었다원을 위아래로 훑는 눈은 밤마실 의상 대한 딴지를 충분히   있었다어금니를  깨문 원이 다시 입을 열려하자 대비가 손을 들어 말을 가로챘다.

     

"전하전하가  즉위했을  기억나십니까."

"남평 문씨 가문이 반역을 일으켰던 열해가 지났군요."

"맞습니다전하께서 손수 반역자들을 처단하셨지요."

     

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손에 묻은 미지근한 피가 몸을 타고 오르는 기분이었다 여섯의 원에게는 가혹했으리라잔인한 풍광보다는  당시 원이 느꼈던 불쾌한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역했다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대비의 생각도   없어 머리가 아팠다.

     

"요즘 그에 관한 소문이 돌아서 하는 말입니다도망친 손자가 있었다는 군요풍산 홍씨 가문의 아들 사이에서 나온왕가의 핏줄입니다."

     

풍산 홍씨라고 하면 대비의 친척 일가  하나였다이라떠오르는 얼굴을 재빨리 지워버렸다그저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원이 입안 살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들리는 얘기로는어느 기방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는데조심하셔야겠습니다."

"-기방이라고 하셨습니까."

"벌써 의금부에서 수색을 시작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 감사합니다대비마마에게 심려 끼칠  없도록 해야겠군요이렇게 직접 우려의 말씀을 하게 만들어 송구스럽습니다이런 밤에 마주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죠."

     

정중하고 잔잔하게 전해진 말이었지만 날카로워진 원의 눈빛에 대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굳이 찾아와서 말을 전하는 꼴이 어색하다는  원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날이 쌀쌀하니 얼른 들어가시는게 좋겠습니다."

"전하도 밤마실 다녀오십시오."

     

밤마실이라우습기도 해라가벼운 인사를 하고 원을 지나치는 대비의 입가에 명백한 비소가 걸려있었다원의 이가 뿌득갈리는 소리가 났다.

     

     

궐을 나서자 찬바람이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예의상 던진 말이었는데정말로 냉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복잡한 머릿속에 신경을 쏟지 않기 위한 걸음이기도 했다그리고 이런 날씨에도 군말없이   못가에서 원을 기다릴 얼굴 비밀스럽고도 해사한 얼굴이 눈에 눈물처럼 어른거렸다원은 이성의 비명을 무시했다익숙한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작게 인기척을 내자 미소를 띄운 홍이 곧장 눈을 맞춰왔다코를 훌쩍이면서도 달빛이 비친 연못마냥 맑게 웃는 홍의 눈을 원은 똑바로 마주할  없었다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원이 손을 뻗어 홍을 일으켰다

     

"바람이 차다들어갈 곳은 없겠느냐."

" 끝방이  방입니다따라오시지요."

     

발소리를 죽이고 향한 방은 손바닥만한 쪽방이었다순영을  밖에 앉혀두고 둘이 들어가도 대충 가득차는 모양새였다 자꾸 밖에 나와 있나 했더니원우가 설핏 나오려는 웃음을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억눌렀다.

     

자리를 잡고 앉자 침묵이 흘러내렸다원이 말없이 어두운 얼굴을 하니홍도 덩달아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주변을 느리게 둘러보던 원이 홍의 얼굴에서 눈을 멈췄다.

     

"너는내가 누군지 아느냐."

     

갑자기 던져진 묵직한 질문에 홍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원은 여진히 느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네가 누군지 아느냐."

     

눈도 깜박이지 않는 홍의 표정은 애매했다조금 뒤에야 질문의 연유를 알아  건지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원은 허탈한 숨이 입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안다원도 자신이 유치하게 굴고 있는 것을 알았다홍은 역모는 커녕 나른하게 목숨을 부지하는데 행복해 하는 사람이었고그의 잘못이라고는 역모를 일으킨 자의 피를 담고있다는 것이 전부였다그리고  오래되고 어설픈  때문에 원은 울컥이는 가슴을 삼켜야 했다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알고도 모른척 했던 것인가뻔한 답이 튀어나왔지만 원은 눈을 감았다홍은 속으로 남을 비웃을 사람도악의를 품고 기만할 사람도 아니었다다만  없는 감정이 원을 휘둘러댔다그렇게나 굽히고 싶지 않던 대비에게 농락당한 것에 화가  것일 수도 있었다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홍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원이 문고리를 잡자 홍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를사랑하십니까."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가 흩어지고 안의 어두운 소란은 금새 잊혀졌다홍은 고개를 묻었다빛이 사라지고 사위가 검게 내려앉았다.

     

     

"일찍 왔네."

     

얼굴도 보지않고 건네는 인사가 덤덤했다원우가 늦은 편은 아니었다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이며 보낸 시간을 더해도 약속 시간인 세시 까지는 십분이나 남아있었다다만 반쯤 투명해진 커피가 지수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생각에 빠진 시간을 증명해줬을 뿐이었다.

     

"오랜만이야."

     

 부드러운 말투와 표정이었지만 원우는 지수가 화가 났다는  정도는 알아챌  있었다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내는 방법조차 모르는 것이었다뭐라 말을 붙이려다 마땅한 소재를 찾지 못해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불안하게 비벼댔다.

     

"혹시내가 실수한  있어 마신  부른거 사과할게."

"아무일도 없었어괜찮아."

"근데   연락만 씹어?"

"-."

"나는너랑  되가는  알았어너도 좋아하는  알았어내가  좋아하는 것처럼."

     

눈썹이 팔자가 되어 우물우물 하는 말에 원우는 혀로 입술을 쓸었다입을 열면 목구멍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같았다깊게 숨을 들이켰다.

     

"미안해나는  그렇게 생각한 -."

"나도 미안해사실  친구들 만났어."

"?"

"찾아간  아니고길에서 만났어 알아보길래 같이  먹었어그리고  얘기 들었어."

""

" 좋아해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힘껏 눌러뱉는 말은 또렷하고  어느정도 빛나서 원우는 또다시 말을 잃었다어떤 새끼가 그걸 말하고 다녔는지 색출해내던 머릿속이 지수의 눈으로 가득  기분이었다.

     

"잠깐만."

"아니로 대답해 좋아해?"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눈을 느리게 감았다눈을 뜨자 잔잔한 눈빛이 다시 나타나고 지수는 커피잔을 쥐었다

     

"좋아해형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거침없이 질문하던 기세는 어디가고 원우의 입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볼이 달아올랐다눈은 깜빡이고 입은 벙긋거렸다고장난  같네원우가 소리없이 웃자 그제야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그래맞아!"

"뭐가 맞아."

"네가  좋아하는게 맞아아니아니맞았어맞았던 거구그래."

"그래도  형이랑 연애는  ."

"!"

"형도 들었다며."

"원우야 이미  많이 좋아하잖아."

     

얼씨구원우는 아직도 홍조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직구를 날리는 지수에 헛웃음을 터트렸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 싶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오히려 지수를   동안 애틋함이 커졌는지 지금 지수와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 꿈만 같았고 아까 지수가 던진 '내가  좋아하는 것처럼.'에는 머리가 멍해지기까지 했으니까그래도 애써 무던한  말을 넘겼다

     

"계속해 ."

" 나랑 만난게 2월이니까벌써 우리 칠개월 넘게 알고 지냈거든?"

"그렇지."

"솔직히   만났을 때부터그건 아니라 쳐도   언제부터 좋아했어."

"뭐하는 거야유치하게."

" 생각해 ."

", 4 쯤인가."

"."

     

 다시 붉어진 얼굴에 원우는 기가  지경이었다

     

" ."

" 여름부터인  알았지."

"계속 얘기해 ."

"암튼그럼 네가  좋아한게 다섯  정도 됐잖아."

"그렇지."

"근데  멀쩡해!"

     

바싹  목에 지수의 밍밍해진 커피를 가져다 빨던 원우가 미간을 잔뜩 좁힌  지수를 쳐다봤다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그게 무슨 논리에요."

" 친구들이 너보고 저주받았다는게엄청 짧게 만나도 그렇게-."

"알았어요잠깐 생각할 시간을  줘요."

     

지수 말이 틀린  아니었다원우의 저주는 매우 빠른 시간 안에 나타났고 원우가 마음을 버리면 빠른 시간 안에 모습을 감추었다보통은 삼개월 안에 시작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알아원우야."

     

원우가 망설이는 눈빛을 하자 지수가 덥썩 원우의 손을 잡았다초롱초롱한 눈빛에 입꼬리도 예쁘게 휘어있었다.

     

"내가너의 마지막이야."

     

     

젖은 머리를 털던 원우가 피식 웃음을 떨어트렸다내가너의 마지막이야오글거리는 말을 던져놓고 제풀에 화드득 열이 오른 지수가 다시 떠오른 탓이었다옳은 선택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다만그렇게 붉어진 얼굴로 환하게 웃는 지수의 얼굴은어쩐지 원우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오늘의 지수는 어쩐지 신기했다항상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미소만 짓다가 꽤나 필사적인 얼굴을 했으니원우 입장에서는 역시 기분좋은 일이었다지수를 사랑하게  뒤로 점점 유치해지는  같았다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냉장고를 열었다이유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맥주캔을 바라보며 망설이던 원우의 뒤로 초인종이 울렸다 밤에누가.

     

" 하루만 재워줄  있어?"

     

체인이 걸린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걸쳐있다익숙하다기 보다는겨우 몇시간 전에  얼굴지수가 머쓱하게 웃자 원우는 말없이 문을 열고 지수를 맞았다같이 사는 동생이 친구들 데려온다고 했는데 잊어버렸어근데 마침 네가 근처에 살잖아혹시나 해서 와봤지신발을 벗으며 조잘대는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지수와 달리 원우는 현관에 그대로  지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깔끔한 집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지수가 뒤따라오지 않는 기척에 몸을 돌렸다원우는 잠깐의 고민에 빠져 그런 지수를 멍하니 보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오늘은 손만 잡고 자자."

"뭐라고 했어?"

"아니야씻을거면  빌려줄게."

     

금방 쏟아지는 물소리가 울리고 원우는 침대에 등을 기댔다의식하지 않으려해도 자꾸만 허허실실 웃음이 나왔다지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가장 먼저 찾는다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이상하게 심장이 아파왔다.

     

     

비난할  없었다책망할  없었다원은 차가운 밤을 걸으며 뜨겁게 올라오는 울음을 삼킨다다른  없이 홍의 방을 떠난 것은 자신을 속인 홍이 미워서가 아니었다원은 홍을 미워할  없었다홍의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했다고오히려 그렇게 생각했다.  

     

상처받았을 것이다 유순하게 행동했고원의 감정에 응할  마저 그랬다마찬가지였다원의 커다랗고 매서운 감정 역시 홍은 고요하게 품고  조각을 살포시 뱉은 것이었다사랑한다면 믿어달라는 이야기를 무참히 부숴버린 것이었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무너지는 몸에 순영이 급하게 원을 부축했다차게 식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휩쓸리지 않기로 다짐했는데꼭두각시가  기분이었다대비의 손짓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꼭두각시가

     

원은   이후로 밀회를 그만두었다홍을 다시  낯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자신이 찾아가면 위험해지기도 하고이미 대비가 눈치를  이상 대비의 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지는 얼굴엔 무거운 기운이 흘렀다.

     

지켜야할 것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하지만 지키고 싶어지자 금새 약점이 되버렸다

     

원은 깊숙히 가라앉아 홍을 생각했다오밀조밀한 얼굴커다란 조용히 날아가는 숨소리까지원은 종종 순영을 보내 홍의 안위를 확인했다옮긴 거처는 괜찮은지먹을 것은 충분한지여전히 잠들지 못하는지홍이 보낼 미래까지 고민했다그를 위협하는 자는 누구이며위험할 상황은 어떻게언제오는가그리고 내가   있는 것은무엇일까.

     

     

모든 것은 조용히그리고  조용히 이루어졌다소리없이 다가가야 그녀의 목을 조를  있었다원은 평소 어떤 의미로든 낌새가 있던 자들을 조사해 소수만 끌여들였다소극적인 진행을 막으려 직접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그들은 원과의 직접적 접촉없이 진전상황을 알렸다

     

원은 대비에게 전에 없이 복종했다그녀의 심기가 거슬리지 않게홍을 걱정하느라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굴었다머리를 조아리며 눈에 띄지 않게 칼을 가는 것이었다.

     

"실수가 있으면그때는"

     

원은  날을 떠올렸다왕이 되고 처음으로 목도한 참극원에게는 혹독한 신고식이자 홍에게는 몇백겹의 눈물이었다이젠 쉽게도 사라지는 목숨만을 떠올리지 않는다눈물을 쏟아내던 눈이 움직임을 멈추고 굳어버린 순간을흐느낌을 뱉던 입술이 차갑게 말라버린 순간을 하나하나 기억할  있게 되었다깃털같던 생명이 뼈를 깎는 죄악감으로 다가왔다

     

익숙하다 느끼던 감정도 사라졌다두려움으로 가득한 공기와  틈을 파고든 피비린내에 둔해졌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흔한  장면들에 홍이 들어감으로 온통 아픔의 기억이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모두가 죽소."

     

날짜가 정해졌다  보름벚꽃이 만개한   이었다.

     

     

"맥주?"

     

욕실에서 나오는 지수에게 차가운 맥주캔을 들어보였다지수가 술을 좋아하지 않는  알고 있었지만 어정쩡한 분위기에는 알코올이 제격일  같았다같은 생각이었는지 지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 몇개를 까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연락이 끊긴 동안의 일을 말하던 지수가 취기가 오르더니 원우를 노려보며 투덜대기 시작했다평소보다 늘어진 혀로 우물우물대는 꼴이 술에 제대로 빠진  같았다.

     

"너는 진짜바보야갑자기 나만  무시하고 완전 섭섭해따나는  친구들도  모르잖아물어볼 사람도 없었고속상하다 말할 데두 없구우너랑 너무너무 멀어진  같았어."

"그랬구나미안하네."

"그래서 친구들이랑도 친해지려구우도망가려고 하면 묶어놓으라고 하게."

"내가 도망갈 일이 뭐가 있어."

"항상항상 그랬지이번도 그렇고옛날에도  보면 끝나는 것두 아닌데너무 겁이 많어어."

"옛날?"

" 옛나알아주아주옛날에그동안은 나도  기다리기만 했는데너무 힘들어써."

"무슨 소리야제대로 얘기해 ."

"그냐앙 내가  그만큼 사랑한다안그런 얘기이-"

     

말끝을 흐리며   없는 이야기를 마친 지수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넋을 놓고 지수의 말을 해석하던 원우는 한숨을 쉬었다지수의 술주정  이야기도 이상했지만  이상한 것은 지수의 이야기를 듣자 오래된 기억이 머릿속에서 술렁인다는 거였다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늘어져 잠에  지수를 대충 부축하고 침대로 옮겼다깨우지 않으려 조심히 움직였지만 역시 한계가 있었다침대에 등이 닿자 나른한 눈이 떠졌다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은 얼굴이 슬퍼 보였다물기어린 눈을  지수가 손을 들어 자신을 내려다 보는 원우의 뺨을 감쌌다

     

"그래도이번엔 내가 잡았어."

     

갑자기 또렷해진 목소리에 원우가 당황하는 사이 지수는 몸을 살짝 일으켜 입을 맞췄다지수의 감은  사이로 떨어진 눈물이 흐릿한 길을 남기며 턱에 맺힐 쯤에야 원우도 지수의 볼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짙은 키스가 이어졌지만 원우는 다시 지수를 눕히고 침대를 정리했다금새 골아떨어진 지수가 낮은 숨소리를 냈다달이 밝아 지수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밤에는 쓰지 않던 커튼을 쳤다어두워진 방을 조용히 나서자 그제야 원우는 편히 숨을 쉬었다.  

     

키스 내내 눈물을 흘리던 지수를 생각했다왠지 모르게 아릿한 심장께를 붙들게 만드는 눈물이었다그리고 입술이 떨어지자 속삭이던 . '너를 용서해 .' 화장실에 들어간 원우는 그제야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름달 아래 대비는 형형한 웃음을 지었다흩날리는 벚꽃잎이 무색하게 원의 칼날은 형편없이 부서졌고 부서진 칼날은 그대로 주인에게 돌아오고 말았다그러니까원의 작전은 실패했다그리고  댓가는 원의 가장 소중한 대비는 제대로  본보기를 계획했다.

     

화창한 봄날 연분홍 벚꽃이 시뻘건 색으로 물들고 원은 초조하게 홍의 안위를 걱정했다순영을 내보낼 처지가  되는  역시 섣부른 움직임으로 인한 결과  가장 가벼운 하나였다대비 암살에 동조한 관리들의 일가가 처형당하고 있었다원은 사그러드는 생명들을 보며 입술을 터트렸다그리고 역시나 홍을 생각했다.

     

"이제 주동자를 끌고 오너라!"

     

대비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주동자주동자는   자신인데원은  나쁜 희생자에게 사죄의 기도를 올리려 눈을 감았다순영의 손이 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기 전까지 말이다.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는 없을것이라원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 결말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초연한 눈과 앙다문 입에서 시선을 돌리고 거짓이라 믿고 싶었다몸이 무섭게 떨렸다 앞에 칼이 들어와도화살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을  같았다

     

"잠시잠시 기다려라."

"무슨 일이십니까."

" 친히 내릴 말이 있다."

     

흔들리는 목소리에 튀어나오는 대비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신경  겨를이 없었다원은 무릎꿇은 홍에게 다가갔다다리가 후들거려 몇번이나 주저앉을 뻔한 것을 순영이 일으켰다비틀대는 걸음이 홍의 앞에 멈추자 홍은 원을 올려다봤다그리고  생채기가  얼굴로자신의 잘못은 없음을 알면서도 의연하게 웃었다원에게 평화롭게 웃어보였다나지막히 건네지는  역시 평소와 같았다그럼에도 원은당연히도 원은

     

울음을 삼키며 자리를 떴다 자리에 있어도  앞이 흐려 홍의 마지막 따위는 보지 못했으리라홍의 마지막 마디 역시 홍다웠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은 그러지 못했다스스로를 원망하고  원망했다삼키는 침이 독이었고 내쉬는 숨이 악이었다사랑이 눈을 멀게 만들었다 생각했다멋대로 사랑해버려서  손으로 홍을 죽이고 말았다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여라너는 사랑하는 모든 자를 불행하게 만드리라.

     

스스로를 저주했다

     

자신에게 저주를 내렸다.

     

홍의 용서가 소용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저주했다.

     

억만겹의 저주를 내렸다.

     

     

여의도엔 사람이 꽃보다 많대

     

지수의 얘기에 원우는 계획한 벚꽃놀이 장소를 수정했다바뀐 장소는 원우네 아파트 단지  정자도시  정원으로 기획해 벚꽃이  흐드러지게 그럼에도 사람은 별로 없는 원우만의 명소였다실망할 법도 한데 지수는  유쾌하게 웃었다저녁은 좋은데 가자미안한  말하는 원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자에 나란히 앉아 의미 없지만 즐거운 말들을 주고 받았다 다정하게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고 손을 마주잡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바람이 불때마다 벚꽃잎이 정자를 감쌌다종종 동그란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으면 우습지도 않으면서 소리내어 웃으며 후후 불어댔다원우가 정자 안까지 흘러들어온 조그만 꽃잎을 눈으로 좇았다덩달아 원과 시선을 같이한 지수는 고개까지 휙휙 돌아갔다원우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떴다.

     

"예전엔 벚꽃이 싫었는데."

     

빙그르르 돌아간 꽃잎이 맞잡은 지수의 손등에 떨어졌다.

     

"벚꽃을 보면 슬펐거든왠지 모르게." 

     

조심조심 손을 들어 꽃잎 위로 입술을 부볐다지수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이제는 아니야?"

"이제는 아니야."

     

원이 고개를 들자 입술에 꽃잎이 붙은 채였다입을 가리고 웃던 지수가 동그랗게 눈을  원우의 입술에 다가갔다.  그건 사실-

     

"내가  다시 사랑하기 때문이야."

     

입술이 닿을듯 말듯 숨이 섞이는 곳에서 지수가 소근댔다종종 이렇게 알다가도 모를 소리를 한다원은 익숙해진 이상한 얘기에 그저 입꼬리를 올렸다입을 맞춘  사이로 다시 한번 꽃잎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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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크색 네온으로 장식된 벽을 응시하던 순영이 포크를 내려놓는 조슈아의 움직임에 몸을 굳혔다. 연속적이던 돌발 행동에 음식을 먹는 내내 잔뜩 긴장해 있었지만 지수는 얌전히 볼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긴장한거야?"

"네?"

"나 아무짓도 안 해. 편하게 먹어."


내리깐 눈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는 얼굴이 핑크빛 조명을 맞아 상기되어 보였다. 순영은 그제서야 서툴게 고기를 썰기 시작한다. 한 번 고급스러운 음식이 들어간 배는 속을 조이며 더 많은 걸 원했다. 눈치를 보자 조슈아가 눈을 깜박이다 웨이터를 부른다. 뭐 더 먹을래?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순영이 홀린듯 메뉴판을 읽었다. 거지근성, 이성이 씨부리는 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자 마음이 편해진다. 


"조슈아는 더 안 먹어요?"

"난 배불러. 너 편하게 먹어. 데이트 신청한 쪽이 내야지."


 켁, 데이트 소리에 순영의 목이 꾹 막혔다. 이런 레스토랑에서 메뉴 여덟개는 껌이고, 기사가 있는 버스만한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지금 나랑 데이트를 하-고 있다 믿-는게... 정상적이지는 않으니까. 현실적인 생각에 빠지는 것은 어느정도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순영아, 순영의 얼굴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지수가 말을 걸기까지 순영은 칙칙한 자신과 자몽빛 머리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지수는 순영의 대답을 기다리며 로제 파스타 접시에서 통통한 새우를 뽑아 먹는다. 


"...네?"


한참이 늦은 대답에 눈이 접혔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꼬리에 순영의 마른침이 삼켜진다. 


"나, 오늘 하루만 재워주라."




회색구역은 가로등 불빛도 칙칙했다. 지수는 순영의 뒤에서 헉헉대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 오르막길은 매일 전용이란 이름의 교통수단들을 거느리는 지수에겐 가혹했다. 모래주머니를 단 다리 대신 얻을 수 있는 것은 순영의 팔뚝 감촉과, 약간 땀에 젖은 옆태. 흐응, 가쁜 숨을 쉬는 와중에도 기분좋은 콧소리가 흘러나온다. 


"많이 힘들어요? 그러니까 집은 좀..."

"아니?! 나 괜찮은, 후하! 괜찮아!"

"업힐래요?"


응!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던 지수가 갑자기 몸을 꼿꼿이 세운다. 속으로는 오백번도 더 지시했을 일이지만 결국 온몸의 외침을 묵살하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명백하게 인위적인 미소에 신경쓰이지 않는게 이상했다. 결국 지수의 얼굴은 불긋하게 익어 순영의 어깨에 놓였다. 달랑이는 고급 로퍼에 순영의 표정이 묘해진다. 



 지수가 앉아있는 낡은 침대에선 텁텁한 냄새가 나고 천장엔 거뭇한 얼룩이 있다.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좁은 집은 전체적으로도 세부적으로도 엄청 퀴퀴했다. 지수의 침대에서 나던 향기를 떠올린 순영이 제풀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말리는 지수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이리 와 봐. 내가 머리 말려줄게."


보슬보슬해진 머리가 흩날리고 지수가 활짝 웃었다. 순영은 잘 쓰지도 않는 오래된 드라이기를 어디선가 찾은 모양이다. 머쓱하게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침대 아래 풀썩 주저앉았다. 지수의 다리 하나가 내려오고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 사이로 파고든다. 


"찬물로 샤워했어? 따뜻한 물 나오던데?"

"아, 몸에 열이 많아서..."

"혼자 사나 봐?"

"네, 조슈아는요?"

"나는, 많이... 근데 혼자 사는 것 같아. 다 고용인이라. 오늘 저녁은 어땠어?"


 난방비 아껴야 하니까요, 고아에요 같은 궁상맞은 대답은 삼키는게 좋다. 우와앙- 요란한 드라이기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지수의 질문에 대답하며 순영은 어느정도 지수를 대하는 노하우를 쌓아갔다. 

 질문 공세가 끝났는지 바람의 소음 사이로 지수의 콧노래가 섞인다. 너무 긴 하루였다. 순영은 서서히 눈이 감겼다.



 동 트기 전 그 어두운 푸름의 순간. 잠에서 깬 순영은 꿈을 꿨다. 차가운 창 너머의 풍경에 찍은 부드러운 분홍색 점은 순영의 꿈이었다. 나른한 이성은 순영을 벌써 밖으로 나가 그 풍경에 끼어들게 만들었다.

 이곳저곳 잔뜩 패여버린 벤치에 앉은 지수는 낯선 눈을 하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색을 띄고 있는 뉴타운을 바라보는 시선. 지수와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시선. 순영은 지수에게 느낀 적 없는 서늘함에 이것이 꿈이라 확신했다. 꿈, 사랑, 쓸데없는 용기를 주는 것들이 모두 만났으니.

 순영의 인기척에 지수는 느리게 뒤를 돌아본다. 냉한 얼굴을 벗고 다시금 따스한 웃음. 순영은 몽롱한 상태로 지수의 곁에 앉았다. 식어버린 손을 맞잡는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다. 


"알죠. 우리 하나도 안 어울리는 거. 척 봐도 뉴타운 상위 몇프로에서 노는 조슈아랑, 회색 구역에서 빌빌대는 나랑. 딱 만났을 때, 돈 받고 자는 그런 관계가 우리한테 딱 맞았을지도 몰라요."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어설픈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매끄럽게 말을 잇는 순영의 표정은 덤덤했다. 새벽에 걸맞는 분위기에 지수도 묵묵히 매끈한 옆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조슈아도 알고, 나는 더 잘 아는데. 조슈아가 자꾸 그걸 모르는 것 처럼 구니까 나도 잊어버려요. 둘만 있으면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니?"

"나랑 한번 더 자려고 찾아왔어요?"

"그것도 있는데-"


 지수가 시선을 발끝으로 처박았다. 외면당한 뉴타운을 지켜보는 것은 이제 순영 뿐이었다.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두번째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온 몸을 둘둘 감싼 이불이었다. 여기저기 튿어진 오래된 이불은 회색구역의 탁한 바람에서 순영을 지키는 중이었다. 벤치에 길게 누운채로 순영은 흐릿한 꿈을 더듬었다. 찬 공기가 순영의 청회색 머리를 훑고 지나간다. 

 꿈이었다. 사랑이었을까. 순영은 슬리퍼를 찾아 신으며 눈을 끔뻑였다. 어디에도 지수의 흔적은 없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 하룻밤만에 사라져버린 지수에 순영은 허탈함 섞인 슬픔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불을 들쳐매고 또 나갈 준비를 한다. 뉴타운의 달콤하게 칠해진 벽을 지난다.  


 어딘가 한 귀퉁이를 지수의 곁에 끼워놓는 바람에 순영은 바쁜 하루하루에도 멍한 얼굴을 유지했다. 눈을 뜨면 익숙하게 점퍼에 팔을 끼우고 미간을 주무르며 가게로 나갔다. 

 스웨터를 걸치곤 진열대로 향하는 순영을 로지부인은 퍽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연분홍 연기를 뻐끔뻐끔 뱉는 파이프를 내려놓고 순영의 옆에 섰다. 그리고 건넨 질문에 순영은 그동안 놓고 있던 정신을 붙잡았다. 


"오늘은 어느 집이니?"


 오늘은 장미일이다. 즉, 순영의 이웃 혹은 이웃의 이웃 어쩌면 이웃의 이웃의 이웃 정도는 박살난 집을 보며 한숨을 뱉어야 하는 날이란 말이다. 순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지수가 떠난 삼주, 순영이 넋을 놓았던 삼주 간 어떠한 비명도 울음도 전해지는 한숨의 울림도 없었다. 아, 쇼산나가 하던 말이 그거였나. 멍하니 흘려보냈던 '요즘 이상해'로 시작한 말의 파편이 떠올랐다. 요란한 광고만 띄우는 전광판들을 지나간 걸음걸이의 기억도 살아났다. 


"오늘은, 아무것도요."


 그래서 뭐,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우연. 입안을 맴도는 단어를 곱씹으며 순영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 낀 곰팡이가 밤하늘처럼 새카맣다. 잊자, 잊어. 웃지 못할 사랑의 잔상에 허우적대는 꼴은 웃기지도 않다. 그럼에도 머리를 앞지르는 마음은 또 비죽비죽 지수를 생각한다. 생기발랄한 자몽색과 어두운 색의 집을 생각한다.

 가난은 모든 우선순위를 짓밟고, 사람을 생에 묶어놓는다. 여타 아름다운 것들을 제쳐놓은 그저 온전하기를 바라는 안쓰러운 생에. 순영은 더 바쁜 하루하루를 영위했다. 생각할 틈도 없는 하루의 틈틈이 울먹거렸다.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불만없이 회색을 상속받은 가면이 갈라지고 향긋한 분홍을 가로막는 가난에 주먹질을 하고 있다. 순영은 원망했다. 사라진 지수보다는, 얼룩덜룩한 회색 구역 속 조그맣고 지저분한 집 한채를. 그럼에도 순영은 말없이 칙칙한 집 속으로 몸을 담군다. 조용한 습관을 지속한다. 금이 간 벽을 묵묵히 붙이는 것은 순영에게 어렵지 않았다. 나도 네가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저 그런 거였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 괴로워 순영은 이불을 질질 끌어 밖으로 나섰다. 그때 그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 눈을 끔뻑인다. 밤공기가 볼에 입을 맞추고 가자 졸음이 몰려들었다. 


 차가워진 볼을 감싸는 감촉에 닫힌 눈꺼풀이 공기를 받았다. 눈 앞에서 헤헤 웃는 얼굴이 헬쓱해보여 순영도 지수의 볼을 쓸었다. 몸을 일으켜 앉으려는 순영의 어깨를 붙잡고 지수는 먼저 입을 맞춘다. 몇 번의 다정한 마찰은 순영의 잠을 완전히 깨웠다. 입술이 떨어지자 순영은 급하게 몸을 일으킨다.


"왜-"


 채 말의 형태를 띄기도 전에 손을 들었다. 입술을 누르는 기다란 손가락에 순영의 눈이 동그래진다. 한 번 사르르 웃은 얼굴은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 순영은 얼떨떨하게 이불을 나누어 덮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아, 순영은 턱 막혀버린 속에 차마 대답을 끄집어내지 못했다. 지수의 시선을 따라간 뉴타운, 뉴타운을 감싸고 있는 회색구역. 아니, 더 이상 회색구역이라 부를 수 없었다. 터오는 동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집들은 온통 새파랗게, 맑은 하늘에 담군 것 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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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색 점퍼를 걸치는 급박한 손길.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구겨신고 순영은 문을 박찬다. 망할, 망할 놈들. 내내 삭지않는 분을 짓이기며 돌조각을 걷어차자 덜컹덜컹 구르는 꼴이 순영의 기분같다. 구불대는 내리막, 아찔하게 타고 내려가는 급한 경사. 돌멩이를 따라 걸음을 서두르자 어느새 칙칙한 벽은 부드러운 연어색이다. 시야가 불그스름해지면 순영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맺힌다. 오웰의 저주를 거부하는 몸부림. 그럼에도 순영은 여전한 헉슬리의 입김을 안다. 아, 헤밍웨이. 한숨처럼 외치는 입술이 삐뚤다. 쓰라린 손바닥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마지막 내리막을 벗어났다. 

 어지러울 정도로 화사한 장밋빛 도시, 뉴타운. 각기 다른 분홍색을 뽐내는 건물들이 한결같은 햇살을 받으며 콧대를 세운다. 어둠과 가난을 쓸어버리고 세운 발그레한 꽃밭은 향기는 없지만 한없이 정갈하다. 한없이 파란 하늘은 정확히 매 수요일 일곱시부터 비를 쏟고, 격주 토요일에 하얀 눈꽃을 뱉는다. 뜨겁지 않은 햇살, 랜덤으로 나열되는 구름들과 그 사이를 나비처럼 맴도는 풍선 혹은 꽃잎들. 거리에는 규칙적으로 늘어진 메타세콰이아와 붉은 튤립이 삶의 질을 드높인다. 뉴타운의 주민들은 매일 아침 같은 해를 바라보며 외쳤다. 찬란해라, 뉴타운 천국!



반짝이는 것은 모두



 이 찬란한 도시에서 칙칙한 건 순영 뿐이었다. 푸슬푸슬한 청회색 머리, 쥐색 점퍼와 검은 진, 그나마 밝은 흰 스니커즈는 때가 잔뜩 끼어있다. 좋지않은 눈길이 느껴지지만 순영은 개의치 않는다. 사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다. 불만스러운 얼굴이 성큼성큼 거리를 가로지른다. 

 순영은 일주일 중 오늘, 그러니까 장미일을 가장 싫어한다. 언젠가의 사람들은 월요일이라 불렸던 한 주의 첫 날. 이름이 바뀐 것도 누군가 순영처럼 이 날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순영이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색색깔의 장미를 꽂고 있다. 커다란 전광판은 외친다. '모두가 행복한 장미일!' 번쩍이는 버블껌 색의 글씨가 순영을 바닥에 처박는다. 건너편 전광판엔 '서로에게 사랑을 선물해요' 저것 때문이다. 저 생각없는 슬로건은 순영의 몸을 녹초로 만든다.

 뉴타운 제 2구역과 제 4구역 사이, 정식 명칭을 따르자면 레드산드라와 데플다운이 맞닿는 거리에 순영의 일터가 있다. 적갈색 나무에 하얀 페인트를 칠한 '로지 핑크의 초콜릿 가게'는 뉴타운에서 유일하게 순영을 받아 준 가게였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장 로지씨 부부는 순영을 퍽 마음에 들어했다. 그 이유는 순영조차 알 수 없지만 굳이 그에 대해 캐묻진 않는다. 어렵게 얻은 직장을 놓치고 싶지 않으므로….

 여튼, 장미일에 서로에게 건네는 선물은 뉴타운에선 오래된 풍습이자 영원한 유행이다. 덕분에 장미일이면 연분홍 장미를 가슴에 꽂은 여자가 점잖게 포장된 초콜릿을 사가고 열 살 남짓의 동그란 볼의 남자아이도 초코바에 빨간 리본을 부탁한다. 저녁 쯤이면 상기된 사람들이 가게를 가득 채우는데, 순영이 가장 싫어하는 날의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다.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덮쳐오는 우울함은 다른 때보다 배로 역겹다.

 평소라면 이정도로 순영의 거지같은 기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는 빨간 피가 몽글몽글 새어나오는 손바닥과 관련이 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새벽 사이 사라져버린 순영의 집 동쪽 벽과. 


 말했듯이 뉴타운은 어둠과 가난을 쓸어버리고 세운 도시다. 그 화려한 핑크들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뉴타운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세 달 전, 뉴타운의 모든 전광판이 같은 글씨를 띄웠다. 강렬한 마젠타 색과 번뜩이는 굵은 광채가 온 눈을 사로잡았다. 


 홀리데이 프로젝트!


 뉴타운 외곽의 회색구역을 물들이는 대국적 프로젝트. 오래전부터 뉴타운은 회색구역의 거주민들에게 집을 바꿀 것을 제안해왔다. 오래된 집을 부술 수 있게만 한다면, 새로운 붉은 집을 지어주겠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다만, 그 완성된 집을 무료로 넘길 정도로 자비롭진 않았고 더욱이 회색구역의 사람들은 화려한 핑크 하우스를 구입할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다. 그럴 돈이 있었다면 애초에 뉴타운 내부로 이주를 했겠지.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꿉꿉한 곳에 몸을 비집고 있는덴 거창한 이유가 있는게 아니다. 홀리데이 프로젝트는 이러한 이유로 뉴타운의 제안을 거절한 회색구역을 파괴하는 중이다. 

 일요일에서 장미일로 넘어가는 새벽, 회색구역의 집 중 20가구가 부서진다. 지붕이 날아가거나, 집의 모든 창문이 깨져있기도 했다. 깡패처럼 행해지는 이 작전에 뉴타운은 열광한다. 지난 세 달간 순영의 집은 운 좋게 그 손길을 피해갔다. 너저분해진 집의 주인들은 작지만 멀쩡한 순영의 집을 보며 행운의 여신이 살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지붕만 보살피는지. 찬 바람을 먹은 목이 칼칼하다. 평소보다 트인 공기를 마시며 눈을 뜬 순영은 넓게 펼쳐진 전망을 확인하고 목을 억세게 쥐었다. 얼굴이 보라색이 될 때 쯤 손을 놓았다. 머리가 아득했지만 기침을 하면서 잿빛 잔해를 치웠다. 순영은 산소가 부족해 어질했던 그 상태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 죽음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결론을 내린다. 

 코너만 돌면 유리 진열대에 화려한 초콜릿이 늘어진 '로지 핑크의 초콜릿 가게'가 나온다. 가자마자 분홍색 앞치마를 입은 뒤, 문 앞을 쓸고…. 반복될 하루에 한숨이 나와 걸음을 멈추고 옆을 스쳐지나간 파스텔톤의 커다란 자동차를 눈으로 좇는다. 씹다뱉은 딸기맛 껌 같군. 저 차를 탈취하고 이 좆같은 뉴타운을 뜨는 상상을 한다. 여러모로 영양가 없는 망상이다. 머릿속에 그려지려던 그림을 흐트러트리는데 딸기맛 껌이 급하게 방향을 바꿔 순영의 앞에 멈춰섰다.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차가 덜컹인다. 분홍색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팔을 끌어당긴 흰 장갑을 거칠게 뿌리쳤다. 어정쩡하게 차 한가운데 널부러져 주변을 둘러본다. 외형보다도 훨씬 크고 넓어 보인다. 문이 있는 면을 제외한 모든 벽에 소파가 붙어 있었다. 자신을 잡아당긴 듬직한 남자 이외에도 백금발을 깔끔하게 묶은 여자와 탁한 장밋빛 머리를 한 어린 남자가 자신을 바라봤다. 죄다 무미건조한 표정인 와중에 장미 남자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순영에게만 어리둥절한 침묵이 지나간다.


"저, 저기요…?"

"영, 빨리. 나 빨리 하고싶어."

"잠시만요, 찾아도 안 나온다구요."

"저기요, 뭐 하시는 건데요."


 순영의 얘기를 하면서도 철저하게 순영을 제외한다. 순영이 다시 입을 열려는데 탭을 두드리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연한 갈색 눈이 순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픽 대상이 아니네요. 조슈아, 실수 했어요."

"뭐? 아냐, 손바닥에 분명…."

"이거요? 그냥 상천데."


 검붉은 핏망울이 그대로 굳은 상처를 보여주자 셋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장미 남자, 조슈아의 눈썹은 울 것처럼 처졌다. 청회색 머리가 드디어 돌아가기 시작한다. 순영을 일종의 매춘부인 피크로 오인한 것이다. 급작스럽게 머리를 침범한 깨달음에 순영은 벌떡 일어나다 머리를 박았다. 그새 등이 축축해졌다. 분한 마음이 피를 뜨겁게 달군다. 저기요! 당차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좀 내려주시죠..."


 어쩔 수 없다. 부자 앞에선 한 없이 약해지는게 태생적으로 빈곤한 인간의 한계다. 어물쩡 말 끝을 흐리자 울상이던 조슈아가 강아지처럼 순영을 올려다 봤다. 지금보니 눈꼬리가 참 묘하다. 순영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돈 줄게, 나랑 자자."




 분명 그 말만 들었을 땐 이럴 생각 없었는데, 순영은 눈 앞의 매끈한 나체로 앉아있는 조슈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침대는 하얗고, 조슈아는 자꾸만 손을 뻗어 순영의 맨 상체를 만지작 거린다. 머리가 지끈지끈. 

 거절하고 싶었다. 거절하려고 했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금액을 제시한 순간 벽이 생각났다. 무너진 벽 한짝. 어쩌면 행운의 여신이 내게 건네는 사과일지도 몰라.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안 벗어?"


  마른 복근을 훑던 손이 바지 버클로 옮겨간다. 서둘러 손목을 잡아보지만 이미 지퍼까지 내려갔다. 착잡하게 바지를 벗자 모든 흥미롭게 바라보던 조슈아가 팔을 당겨 침대로 순영을 이끌었다. 


"처음이니까 해주는 거야."


이르듯이 말하곤 순영을 바르게 눕혔다. 순영의 다리 사이로 꾸물꾸물 들어가 몸을 낮춘다. 낡은 속옷을 입술로 물어 내리는 꼴이 능숙했다. 축 늘어진 순영의 기둥을 길게 핥은 조슈아가 눈웃음을 쳤다.

 한번에 기둥을 전부 삼키고 혀로 넓게 감싸 올린다. 순영의 숨이 멈추자 조슈아는 하얀 허벅지를 두드렸다. 고른 숨이 느껴지고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린다. 그대로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폭 패인 볼이 야하다. 순영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동그란 뒤통수에 손이 얹어졌다. 퍽 솔직한 반응에 조슈아가 순영을 올려다보며 눈을 접었다. 읏, 야살스런 웃음에 순영이 눈을 피하고 조슈아는 그대로 목구멍을 조여 귀두를 자극했다. 

 숨을 크게 먹은 순영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옮겨 마른 가슴 근육을 훑는다. 둥근 유륜을 혀로 문지르자 순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 뭐하는,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조슈아는 다시 어깨를 밀쳐 순영을 눕혔다. 


"처음이니까, 귀찮긴한데..."


 몽롱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입술이 반질반질해 순영은 잠깐 넋을 잃고 조슈아를 바라봤다. 그 사이 조슈아는 순영의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협탁에서 찾아온 분홍색 콘돔을 손가락에 끼웠다. 아우, 잠시 앓는 소리를 낸 조슈아가 손가락을 구멍 속으로 감추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순영의 몸이 침대 헤드에서 멀어졌다. 내가, 박힐 줄 알았는데. 머리가 점점 몽롱해진다.

 점점 다가오는 순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슈아는 구멍을 움찔거리며 콘돔에 끼운 두개의 손가락을 놀린다. 어느새 코앞까지 온 순영과 마주친 조슈아의 눈빛은 나른한 와중에 도발적이어서, 순영은 조슈아의 마른 손목을 잡고 척척한 입술에 입을 맞춘다. 


"야, 응, 읏.."


 가볍게 쥔 손목을 움직이자 능숙하게 순영의 혀를 받아내던 입 속에서 아찔한 신음이 흘렀다. 느릿해진 위와 성급해진 아래의 차이를 조슈아는 저를 닮은 분홍빛 숨소리로 견뎌낸다. 이제, 넣어도 되는데... 공기를 둥둥 떠다니는 목소리가 형체를 찾자 순영의 손이 더 빨라진다. 새 콘돔을 끼우는 손길이 자꾸만 엇나가자 조슈아가 새침하게 손을 뻗었다. 동그랗게 입술에 콘돔을 물고 순영의 성기를 쓰다듬듯 만지작 거린다. 앙 하고 벌린 입으로 기둥을 물고 순영은 재빨리 조슈아를 뒤집었다. 그리고 채워지는 동굴은 순영의 옆에 존재하던 퍼즐같다. 눈 앞에서 튀기는 별빛 속에 순영은 본능을 붙잡았다. 




"너무 잘 해!"


 지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핑그르르 돌아가는 핑크빛 가죽 의자에 몸을 늘어뜨린 채. 진한 붉은색의 벽지에는 향긋해보이는 지수의 반신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곳은 조슈아의 스물 두 번째 섹스 공간, 다르게 말하면 조슈아의 접견실. 상기된 얼굴은 아직도 호시와 뜨거운 밤을, 아니... 반나절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지수가 황홀한 표정으로 호시의 훌륭한, 모든 것들을 떠올린다. 도리도리 머리칼을 흔들며 정신을 차린 조슈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소파에 앉은 영을 재촉했다. 보고싶어! 빨리 찾아줘, 영!


"지금 찾는 중이에요."

"이름치면 금방 뜨잖아. 호시, 이름이 뭐 그렇지. 성도 물어볼 걸 그랬다!"

"본명이 아니에요."

"응?"  

"누가 돈주고 섹스하는 사람한테 신상을 갖다 바쳐요. 멍청해 보이지 않으니까 그 사이에 떠올린 거겠죠. 조슈아도 피킹할 땐 지수란 이름 안 쓰잖아요."

"아하, 그럼 다른 이름은 뭐야?"

"음, 잠깐만요."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영은 탭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토독, 몇 번의 두드림이 멈추고 지수는 화면에 뜬 호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순영, 조슈아보다 한 살 어리네요.


"어쩐지, 엄청 팔팔하구... 막..."

"뉴타운 주민이 아니에요. 이건 좀 문젠데."

"뉴타운에 안 살면? 집이 없어?"

"아뇨, 조슈아는 몰라도 상관 없는데... 홀리데이 프로젝트 대상자에요."

"으응, 그.. 회색구역?"

"네."

"나쁜 애 같아 보이진 않던데..."

"그래도 위험해요. 아버지도 싫어하실 테고."


 금세 침울해진 지수가 눈꼬리를 떨어트리자 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몽 머리를 몇 번 토닥였다. 그새 오렌지 빛이 돋은 머리칼이 사랑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더 이상 관심 가지시면 안 돼요."


 단호하게 말하자 지수의 고개가 수그려졌다. 잠깐 정적이 돌자 영의 손길이 대답을 채근했다.


"Okay..."

"잘 했어요. 전 이제 나가봐야 되니까 패트릭이랑 있어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수리를 확인한 영이 살구색 문을 닫고 나가자 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분홍색 홍조가 올라온 얼굴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탭을 빠르게 두드린 지수는 접견실 빨간 소파에서 자고 있는 패트릭의 너른 어깨를 흔들었다. Pat, 우리 초콜릿 먹으러 가자!





 짤랑이며 울리는 종마저도 분홍색인 곳. 순영은 로지 부인이 직접 뜬 스웨터를 입고 예쁘게 진열된 초콜릿을 진열한다. 프레쉬 트리플의 파우더가 날아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곤 리본을 달았다. 해피 로즈데이! 포장된 초콜릿을 건네는 순영의 목소리를 정수리 저 끝을 맴돈다. 한껏 밝은 목소리에 새빨간 머리의 남자도 환히 웃으며 목인사를 했다.

 조슈아와의 하루로 벽을 고칠 돈을 모두 마련했음에도 순영은 더욱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휑한 광경이 꿈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돈 모아서 뉴타운으로 가게? 옆집의 쇼산나가 담배 연기를 짙게 뿜으며 물어도 순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에 불 붙겠다. 흩날리는 탈색모를 하나로 묶어주고 집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가게를 채우는 달콤하고 진득한 냄새는 두통을 일으키지만 깜찍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초콜릿 포장을 부탁하는 핑크빛 인간들을 저주하는 목소리를 절대 내보내지 않는다. 순영은 표정을 밝게 끌어올릴 수록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가게는 여전히 북적였고 순영을 빼곤 모두 꿈결같은 삶을 사는 듯 하다. 잠시 새까만 초콜릿을 바라보다 부드럽게 울리는 도어벨에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

"안녕-"

"조슈아?"


 크기 조절이 안된 목소리가 작은 가게를 쩌렁쩌렁 울린다. 쉿, 조용히 해야지. 당황한 얼굴의 순영에게 웃어주며 조슈아는 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앤틱 나무 바닥에 애써 신경을 던지지 않으며 순영의 앞으로 다가간다. 


"호시, 아니지, 순영아. 여기 뭐가 제일 맛있어?"

"...조슈아한테는 로즈화이트봉봉이요.."

"응, 그럼 그거 열다섯 세트 주세요. 빨간 리본 달아서!"


 일단 일은 해야지. 방싯 웃는 조슈아에 미소를 잃은 순영이 급하게 헬쓱해진 얼굴로 포장을 끝냈다. 빨간 리본을 다는 손이 벌벌 떨리지만 오년의 노하우는 급하게 일어난 수전증에 지지 않는다. 붉은 지폐를 건네받고 나서야 하고싶은 질문을 쏟아냈다.


"왜 왔어요? 어떻게 알았고?"

"음... 언제 끝나?"

"열시요."

"뭐? ...으, 밖에서 기다릴게."


 손에 가득 초콜릿 상자를 들고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가게 앞의 풍선껌 대형차를 돌려보내고 가게 앞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은 뒤통수가 처량하다. 연한 분홍색이 이제 막 어두운 푸른빛과 맞닿는 시간이었다. 해는 아직도 낮은 주택의 지붕에 반쯤 얼굴을 내밀고는 조슈아를 맞았다. 오렌지 색이 올라와 상큼해진 머리색이 더욱 노란끼를 띈다.


"저기요, 계산 안 해요?"

"..아, 네, 죄송합니다."

 

 봉봉을 까먹는 조슈아를 넋을 놓고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잡았다. 뭘 신경써. 내 일이나 잘하자. 이마를 콩콩 치며 다짐하지만 머리는 자꾸 이성을 엇나가고, 순영은 평생 받을 면박을 다 받는 것 같았다. 결국은 로지 씨의 사람 좋은 미소를 받아내며 분홍색 스웨터를 벗는다. 한껏 죄송한 포즈로 평소보다 두시간은 이른 시간에 가게 문을 박차고 나왔다. 

 하늘엔 어느새 손톱만한 달이 하얗게 떠 있었다. 짙은 푸른색으로 변한 밤이 상쾌해 순영은 기지개를 키곤 조슈아의 앞에 쭈그려 앉는다. 적갈색의 벽돌에 기대 꾸벅꾸벅 조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몇개 남지않은 봉봉을 주워먹었다. 엄청 다네, 이걸 계속 먹었단 말이야? 우물거리며 조슈아의 어깨를 흔든다.


"조슈아, 일어나요. 나 나왔어."

"으응, 영이야...?"

"아뇨, 순영이야."

"순영!"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조슈아에 순영이 더 놀라 비틀거렸다. 쭈그린 포즈에서 흔들리다 손으로 까칠한 바닥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깜짝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이번엔 엉덩방아다. 조슈아가 입술을 마주댔다. 남색 공기 속에 별가루가 쏟아진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빛을 그림자로 만드는 입맞춤에 순영은 어설픈 자세로 눈을 감았다.



 쪽! 입술이 떨어지고 동시에 터지는 깜찍한 소리에 순영의 귀끝이 붉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에 조슈아가 키득키득 웃는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아직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과하러 왔어."


 멍청하게 주저 앉아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순영이 조슈아는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말랑한 볼따구를 붙잡고 다시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저번에 설명도 없이 섹스-"

"와아!"

"응? 왜?!"

"말을, 순, 순화해서!"

"아, 응. 암튼 갑자기 자자구 해서 미안해."

"아, 아녜요. 저-"

"데이트 신청이 먼전데, 그치."

"네?"

"그래서 말인데... 밥은 먹었어?"


 순영은 한 시간 전에 먹은 치즈 오믈렛을 떠올렸다. 아직도 더부룩하게 얹혀있는 계란 찌꺼기가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순영의 입은 어쩐지 그를 무시한다. 아뇨,


"아직 안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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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얀 뭉게구름, 그 틈으로 비치는 눈부신 푸른색. 이질적이다. 조롱에 가까운 찬란에 소년은 눈을 찌푸렸다. 공기에는 잿개비와 탁한 연기가 떠다닌다.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를 떠돌던 훌쩍임이 서서히 멈췄다. 맨발바닥은 사정없이 찢어져 지나온 길에 붉은 도장을 찍었지만 심장의 고통에 가려진다. 돌더미가 된 집 위에서 소년은 생각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가을의 청량을 덮는 탄내. 그리고 그 탄내를 감싸는 희미한 피와 고통의 냄새. 몸속으로 스며드는 절망은 깊이 가라앉은 생각 중에 사라진다. 
     
     
이 냄새는 누구의 것이지, 누구의 손에서 시작됐을까? 
     
     
먼 길을 날아온 낙엽이 귓가에 속삭인다. 어린 소년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듯하다. 날카롭게 찢어진 어미의 심장은 왼쪽, 형체도 없이 뭉개진 아버지의 하체는 오른쪽, 마른 어깨에 아픔 이자 책임을 걸친다. 지수의 얼굴에 젖은 미소가 피었다. 복수는 또다시 맑은 물에 탁한 지혜를 쏟았다. 재앙이 휘저어 놓은 도시를 떠난다. 
     
     
     
2
 얕은 진동에 원우는 식은땀에 잠긴 몸을 일으켰다. 여섯시 정각.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르다.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대를 나섰다. 발을 딛곤 당연하게 따라올 고통을 기다렸지만 얄팍한 저림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방 앞에 놓인 신문을 책상 위에 안착시킨다. 대충 훑은 신문의 헤드라인은 여전히 폭력적이었다. 대통령의 테러 지역 방문, 미국 센티넬 연쇄 살인... 이름도 모르는 연예인의 구설수가 나오자 원우는 신문을 접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창백했다. 원우는 거울 속 자신의 눈을 피하며 목 소매를 끌어내렸다. 붉은 수치는 칠백을 웃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간신히 세 자릿수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는데. 묘한 기대감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준비를 마치고도 가라앉지 않는 마음이 낯설다.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운다. 단 하나 남는 기억이 띄는 냉기. 잔잔한 얼굴이 차가움을 둘렀다.
     
-
     
"몇 년 만이지? 팔 년?"
"구 년."
"와, 난 하루만 가이드 없어도 죽을 것 같던데."
     
     
 빨대를 쪽쪽 빨며 순영이 감탄을 뱉었다. 맛없기로 유명한 코코넛 주스다. 원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입 밖에 낼 필요가 없는 말은 삼키기로 한다. 사실 순영에 말에는 동의하고 있다. 가이드를 만나고 나니 그전으로 돌아가는 건 꿈도 꾸기 싫어졌다. 
     
지수를 떠올리자 웃을 때 원우의 머릿속에 휘어지는 눈꼬리며 입꼬리가 떠다녔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지.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에 순영이 웃으며 숨을 들이켰고 텅 비어버린 캔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났다. 이제 들어가야지, 뻐근한 몸을 터는 순영의 눈에 그 새 익숙해진 얼굴이 띄었다. 
     
     
"니 가이드 와 있네."
"응, 센터 돌아다니다가 맞춰서 오더라."
"센터 볼게 뭐가 있다고 돌아다닌데. 나 먼저 간다." 
     
     
한 손으로 캔을 우그러뜨린 순영이 저 멀리 쓰레기통으로 캔을 명중시킨다. 텅, 하는 소리에 지수가 원우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다. 기다렸다는 듯 퍼지는 미소. 원우는 뒷목을 쓸었다.
     
-
     
가지런히 깍지를 낀 손은 퍽 다정했지만 둘 사이에는 정적만 감돌았다. 얕은 웃음이 퍼진 지수의 얼굴은 넓은 필드를 뜯어보며 달처럼 한 면 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스킨십을 의식하기는커녕 원우의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않고 있다. 괜히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드디어 정면. 불쾌감이나 당황 따위는 조금도 섞여있지 않다.
  
   
"많이 아파?"
     


 늘 지수를 겉돌게 만드는, 혹은 다른 존재를 거두는 평이함이다.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이상 각인이 없어도 감정 공유는 불가피한 일. 그럼에도 원우에게 넘어오는 감정 이라고는 늘 미미한 기쁨에 그쳤다. 지수의 손에는 원우의 손자국이 남을 게 분명하다. 벌써 파랗게 멍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지수는 다정한 혀를 굴리는 것이다. 원우의 볼이 씰룩이고 입이 열렸다.
     


"남자랑 자본 적 있어요?"
"뭐?"
"이제 나랑 자야할 거 아니에요. 뒤로 한 적 있냐고요."
     
  무례하다못해 멍청한 말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뭐. 답지않게 뻔뻔하다. 마른 입술을 훑으며 지수를 봤다. 오묘하게 꿈틀거리는 미간이 보기 좋았다. 유치한 심술, 어설픈 도발. 원우는 물론 지수도 알고 있었다. 뭉근하게 흘러들어오는 당혹감에 원우는 희열을 느꼈다. 우습게도.
 찌푸렸던 눈썹이 곧게 펴졌지만 약간은 떨떠름하다.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원우를 내려다 봤다. 짙은 눈동자와 마주친 눈이 가볍게 접힌다. 졌다, 홍지수는 또 말없이 웃는다.
          
-
     
 결국 순영에게 한마디 들었다. 원우는 함구했으나 지수가 필드에 발길을 끊은 탓이었다. 구 년만에 찾은 가이드에게 잘해주진 못할망정 일주일 만에 쌩을 깠냐, 전원우 성격 참, 하루 종일 눈을 흘기는 통에 그 새 오백을 넘긴 수치가 육백까지 올랐다. 겨우 며칠 보지 못 했다고 눈 앞이 침침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더만, 생각보다 뒤끝이 있는건지. 사과를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에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가이드의 심사 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먼저다. 필드를 나와 복도로 들어서는데 순영의 외침이 뒷덜미를 잡는다.
     


"전원우!"
     


 느리게 뒤를 돌아본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어 순영은 잠시 멈칫한다.
     


"왜.“
"그냥, 가이드 찾으러 가냐?“
"응.“
"만나면 뭐든 사과해라. 잘 좀 챙겨, 줘."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는 모습에 원우가 미간을 좁혔다. 기본적으로 싹싹한 성격이긴 해도 이렇게 남에게 신경을 쏟는 스타일은 아니다. 무슨 얘기를 들은 게 분명하다. 아닌 척 해도 순영은 슬픈 사연에 약했다. 
 원우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순영이 먼저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며 눈동자를 굴리는 얼굴이 곤란하다. 그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순영의 모습에 오히려 호기심이 동했다.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연다.
     


고아래. 센티넬 전쟁, 그때 두 분 다 돌아가셨다더라.
     
     
     
3     
순영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손끝을 부볐다. 연해진 피부는 가벼운 마찰에도 통증을 뱉는다. 숨을 들이쉬며 걸음을 멈췄다. 한숨을 쉬고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뜨린 원우가 입술을 씹는다. 숙였던 몸을 일으켜 걸음을 서둘렀다. 일말의 양심, 아니, 미안함이 원우를 달리게 한다. 텅 빈 복도에 공허한 발소리가 울리고 순간, 지수의 감정이 솟구쳐 몰려왔다.
    
엷게 숨을 몰아쉬며 선 문 너머에서 지수의 공기가 느껴졌다. 센터 간부의 개인 사무실. 문패를 확인하자 욱신거리는 머리의 통증이 전신으로 흘렀다. 왜 이곳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노크할 여유도 없다. 들어가서, 사과, 아냐, 먼저 손이라도 잡자. 문고리를 잡은 손바닥마저 겉 피부가 온통 사라진 듯 쓰라렸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문이 열리고 방 안에 퍼진 편안한 향기, 그리고 피 냄새. 
     


 피 냄새?
     


 예민해진 몸은 시각보다 후각이 지배했다. 어지럼에 눈앞이 흐릿한 이유도 있었고, 공기 속에 섞인 피비린내는 어쩐지 공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꼼꼼히 닦은 듯하지만 여전히 드문드문 핏자국이 묻은 베이지색 러그가 뒤늦게 눈에 들어온다. 수습이 덜 된 사건 현장. 그 안에 들어온 이질적인 두 존재. 머리가 왕왕 울리는 와중에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죽었고, 이곳에는 홍지수가 있다. 피는 홍지수의 것이 아니다. 그럼, 홍지수는.
 젠장, 불그스름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중에 또렷한 이국의 단말마가 이마를 강타했다. 고개를 듦과 동시에 날아오는 무언가를 걷어냈다. 당황한 손이 던진 나이프는 위태로운 자세로도 가볍게 쳐낼 수 있었다. 반격, 을... 휘청이며 팔을 들어보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초점이 맞춰진 동공으로 피 묻은 인영이 비쳤다. 뒤통수에 꽂히는 진실. 무표정한 얼굴은 지수의 것이 맞았다. 흔들리는 눈빛이 잘게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놀랄 것 까진 없는데."
     


 깨끗한 볼에 문대 진 엷은 핏자국이 상황을 고정시켰다. 곤란한 웃음은 형형한 눈빛을 받자 한 발 멀어졌다. 태연한 듯 보이지만 지수도 예상 못한 상황이었다. 원우가 이를 악물었다. 고통도 질문도 많은 표정이었지만 지수는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꽤나 오래 이어지는 정적에 지수가 눈을 굴리곤 피 묻은 얼굴관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이성의 손목을 붙잡던 무언가가 튕겨져 나간다. 원우는 입보다 발을 먼저 뗐다.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갔다. 원우의 거친 숨이 쏟아진다. 상태가 이상하다. 지수의 등 뒤에 식은땀이 구른다. 아, 진짜 망했네. 마주친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며칠 접촉에 소홀했던 결과가 이렇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원우가 괘씸했다기보다는, 착실히 진행되는 계획을 조금만 더 붙잡고 싶었다. 얇은 니트를 끌어올리는 손길을 지수는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이번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뜨고 싶지 않다. 팔을 뻗어 쇄골을 물어뜯는 원우의 뒤통수를 감쌌다.
     
-
     
얇은 목덜미를 단단하게 누른 원우가 다른 한 손으로 지수의 꽉 다물린 구멍을 쑤셨다. 새어 나오는 소리를 억누르는 숨결이 가빴다. 벗지도 못한 니트가 흘러내려 등이 죄 드러났다. 마른 상체는 원우의 폭력적인 애무에 멍으로 얼룩졌고, 뻑뻑한 뒤를 파고드는 손가락에도 원목 책상 위에 얼굴을 묻고 들썩인다. 얇은 몸은 거친 손길에 따라 흔들리기만 했다. 힘줄이 튀어나온 손이 뒷목에서 떨어지고 결 좋은 머리칼을 틀어쥔다. 지수가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머리채를 쥐고 빨갛게 올라오는 핏망울을 바라보던 원우가 지수의 구멍에서 뺀 손으로 급하게 버클을 풀었다. 줄어드는 고통에 묽게 풀려있던 얼굴이 필사적이 됐다. 이미 단단하게 솟은 성기를 구멍에 걸치곤 터진 입술을 핥는다. 눈을 감고 가만히 받아들이는 지수를 원우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본다. 허리를 들이밀자 코앞의 단정한 얼굴에 균열이 생긴다. 목이 따끔거리며 기분 좋게 통증이 수그러든다. 귀두만 끼웠을 뿐인데 지수는 입 맞추던 원우를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원우가 아랑곳 않고 한 번에 넣었다. 
     


"읏, 흐... 악!"  
     


 툭, 하는 느낌과 함께 아릿한 통증이 밀려온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지수가 단말마를 뱉는다. 원우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동시에 움직임이 가팔라졌다. 한 번 터진 입술을 다시 악물자 피딱지가 다시 뜯겼다. 간간이 내뱉는 숨만 느껴진다. 피비린내를 머금으며 숨까지 참아내는 모습이 원우는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는다.
     


"읍, 흐, 으-”
"숨 쉬어요.”
     


강압적인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위압감에 숨을 들이켠 지수가 입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살짝 물고는 가는 숨을 흘렸다. 자존심을 버리는 일은 지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수는 최대한 몸을 늘어뜨렸다. 홧홧한 뒤가 조금은 유연해지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피를 윤활제 삼아 원우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마른 몸이 거친 움직임에 따라 책상과 마구 부딪혔다. 핏방울이 엉겨 부드러워진 구멍이 찔리며 지수는 덜컹거렸다. 아파, 짜증 나. 찢어진 뒤는 원우의 추삽질을 받아낼 때마다 아릿한 통증을 뱉었다. 불규칙적으로 내벽을 찌르는 원우의 더운 숨이 귓가에 떨어져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른다. 짐승, 새까만 흑표의 교미가 이런 느낌일까. 지수는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잊을만하면 머리채를 잡고 입을 맞춰 입술도 너덜너덜하다. 키스라고 하기엔 공격적인 입맞춤을 받아내는 동안에는 숨이 부족한 듯 헐떡이다 비틀대며 원우를 밀어냈다. 몰아서 하는 호흡 중에도 원우는 계속 몰아붙여 잔뜩 쉰 목소리가 힘겹게 신음소리를 냈다. 
     


“잠깐, 아, 흐, 잠깐만...”
     


 웬일로 지수의 휘적거림에 순순히 물러난다. 깊게 박혀있던 성기도 천천히 빼고 책상에 흘러내릴 듯 엎어져있는 지수의 등줄기를 손끝으로 훑었다. 아직도 검붉게 서있는 자신의 성기를 몇 번 손으로 주물거린 원우가 늘어진 몸을 들어 올렸다. 지수의 몸에선 제가 남긴 흥분의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축 늘어진 지수의 성기가 흘러내린 셔츠로 반쯤 가려진다. 원우는 태연히 발을 옮겼다.
 빈 임원 사무실이니 이어지는 쪽방이 있을 것이다. 지수를 고쳐 안은 원우가 팔을 올려 지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걸음걸이에 맞춰 한 번씩 세게 빨아들인다. 찡그린 얼굴이 지친 듯 떨궈져도 계속해서 흔적을 남겼다. 깨끗한 목 군데군데 붉은 마킹이 얼룩졌다. 작은 침대에 가볍게 눕혀진 지수는 눈도 뜨지 못하고 울음을 참았다. 지수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원우는 불긋한 눈가를 손으로 쓸곤 또다시 곧바로 삽입한다.
     
-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여태까지 들은 나긋한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어투였다. 차갑게 깔리면서 동시에 이글거렸다. 약간의 떨림마저 느껴진다. 강렬하게 넘어오는 수많은 감정에 원우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의외다 못해 심각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왜 안심이 되는 건지 원우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장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원우가 내리깐 눈을 들어 지수를 봤다. 침대 위, 멀찍이서 앉아있는 지수는 평정심을 찾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꽤나 불안정하다. 어느 정도 경계심이 담긴 얼굴. 흥미로움으로 번뜩이는 눈이 그 경계를 관찰한다. 
     


“도와줄게요.”
“뭐?”
“도와준다고요, 죽이는 거.”
“아, 아니, 무슨 뜻인지는 아는데. 네가 왜?”
“그냥, 심심하니까?”
“제정신 아니구나.”
“그럼 그냥 지금 잡힐래요? 내가 신고하면 되잖아. 나는 상관없는데.”
“가이드 없어도 괜찮나 봐?”
“센티넬은 가이드가 수감 중이어도 규칙적으로 만날 수 있게 돼 있거든. 알아서 해요.” 
“너 정말...”
     


 퍽 날카롭게 터지는 말들에도 원우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느긋하게 책장 옆 의자에 앉는다. 피하지 않는 눈이 지수의 말보다 예리했다. 새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던 지수는 고개를 돌렸다. 원우의 흑색 동공이 자신까지 빨아들일 것 같았다.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시간을 쪼개는 정적. 무한히 이어질듯한 고요는 원우가 표정을 풀고 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무너졌다. 얇은 목덜미 위로 손끝을 느슨하게 굴린다. 이렇게 손쉽게 관계의 우위에 섰다. 여유가 등허리를 감싼다. 떨리는 목 언저리에 자리 잡은 검붉은 얼룩들.  자신의 증거를 내려다보며 순응을 독촉했다. 지수는 어느새 피식자의 모습을 한다.  


     
 4
 센터의 수장, 박서진은 정부 기관의 우두머리치고는 어린 나이였다. 이제 막 삼십 대의 마지막을 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남들보다 이른 기회를 얻은 이유는 13년 전 센티넬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영웅이었다. 목 언저리에 큰 흉터를 달고 다니는 그는 위풍당당했다. 입을 다물 고도 센티넬로써 할 수 있는 가장 평화적이고 큰일을 해낸이라 나불대는 것 같았다. 그는 일반적으로 존경을 샀다. 센터 일이라고는 연설 나부랭이밖에 안 한다는 투덜거림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랬다. 센터 사람들이나 내부의 일에 관심이 없는 원우조차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그, 박서진?”
 “응. 네가 아는 그 박서진.”


     
 그 박서진이 지수의 복수 상대였다. 영웅이 누군가에게는 범인이었다. 전쟁의 시작과 연관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원우가 중얼거리자 지수는 복수에 무슨 타당한 이유를 댈 필요는 없잖아, 하고 구린 뒷이야기를 한 마디로 일축 버렸다. 사실 뒤 구린 게 걔뿐은 아닌데 다 죽여서, 걔만 남았어.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허,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필드를 구경하던 지수도 원우를 보며 웃어줬다. 원우의 머릿속에 질문이 빠르게 갱신된다.


     
 “미국 센티넬 연쇄살인은?”
“그거는 같이 한 거구.”
     


다시 필드로 눈을 고정한 지수가 조곤조곤 말한다. 거기도 있거든, 아니 거기가 더 많으려나. 암튼 센티넬 전쟁이 한국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쪽 인간들도 많이 엮여있어서 여차저차, 도움도 받았지. 처음 엄마 아빠 죽고 거기로 옮겨져서 고아원에 있다가 그 사람들 만나서 배울 거 배우고. 하암- 태연하게 하품까지 한다.


     
“더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아니면 나 가서 좀 잘래.”
“감정 공유 피하는 거도 거기서 배웠구나.”
 “엉, 근데 마킹 당해서 헛수고 됐지.”
“센티넬이 있었나 보네요.”
“응? 아니. 센티넬은 없었어.”
“그럼 센티넬을 어떻게 죽여요. 일반인이?:”
 “당연히 가이드 먼저 죽여야지.”


     
계속해서 나오는 하품이 대화와 어울리지 않아 원우가 낮게 웃었다. 밤에 잠 못 잤어요? 친근한 말은 목뒤로 삼켰다. 지수는 찔끔 나온 눈물을 닦는다. 그럼 나 자러 간다,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지수가 나른하게 일어났다. 허리를 짚으며 어정쩡하게 걸어가는 게 우습다. 원우도 엉덩이를 털었다. 
     



붉은색을 넘어 푸르스름해진 등허리가 검은 면으로 깔끔하게 감싸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원우는 눈동자를 굴렸다. 제가 낸 손자국이라는 것이 약간은 믿기지가 않았다. 대충 앞머리를 정리한 지수가 드디어 거울 너머 원우와 눈이 마주친다. 숨기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곤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가만히 서 있는 원우를 뒤를 돌아 마주 봤다. 


"왜?"
"어디 가게."
"그냥, 뭐."


 말이 겹쳐도 물리는 소리는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원우의 표정에 지수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보부, 가야 돼. 바닥에 꽂히는 어물거림을 기민하게 잡아채곤 원우도 겉옷을 벗었다. 어두운색의 가디건을 걸친다. 문을 열고 지수를 보는 눈이 차분했다. 




"뭐 해요, 안 가?"
"아, 너도? 으..."




 왜, 하는 뻔뻔함이 잔뜩 묻은 원우에게 지수는 입을 벙긋벙긋하다 한숨을 쉰다. 




"...가자."




 포기한 듯 말을 삼키는 지수에 원우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수가 문을 지나고 부드럽게 문을 닫았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지수의 방. 조용히 걷는 지수의 뒤를 여유 있게 뒤쫓는다. 


-


익숙하게 보안을 푸는 모습에 원우가 소리 없이 혀를 내둘렀다. 정보부의 넓은 어둠이 지수 앞의 컴퓨터 빛에 은은하게 갈라진다. 갈색 동공에 화면이 비쳐 번들거렸다.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울리며 왠지 모를 안정감마저 줬다. 화면을 들여다보자 알 수 없는 숫자만 빠르게 지나간다. 호오, 흥미롭게 들여다보다 지수의 어깨에 턱이 부딪혔다. 지수가 고개를 돌리며 눈을 흘겼지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까워진 간격에 원우는 얼굴을 빼야 하나 잠시간 생각에 빠졌다. 


 지수는 원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코끝을 마주한 채로 눈동자가 저쪽 문에 고정되어 있다. 시선을 따라가 보지만 그냥 문이다. 뭐야, 말을 꺼내려 입을 벌리자 지수가 곧장 눈을 마주한다.
쉿, 손가락을 원우의 입술에 올리더니 커다란 눈이 데구르르. 곧바로 손을 빠르게 키보드에 올려 화면을 끈 지수가 원우를 끌고 벽에 붙은 책장 끝으로 몸을 숨겼다. 차가운 철제 책장이 등에 닿는 감촉에 소름이 돋는다. 원우를 밀어붙이고 원우의 가슴팍에 지수가 바싹 붙었다. 얇은 티 너머로 느껴지는 지수의 가슴팍이 잔잔하게 들썩인다. 


 천 두장을 사이에 두고도 지수는 원우에게 편안함을 줬다. 온통 지수에게 쏠린 긴장이 그대로 안락해졌다. 맞닿은 곳이 기분좋게 따스해 상황과 맞지 않게 나른하기까지 했다. 발걸음이 울리고 손전등 불빛이 한 치 옆을 비껴가지만 원우는 파르르 떨리는 지수의 속눈썹만 들여다 봤다. 매끈한 콧대에 어두운 푸른빛이 돌고 노란 손전등 불빛에 따스함과 차가움을 오간다. 마른 침을 넘기는 목젖. 똑 떨어지는 어깨의 부드러운 직선. 딱지가 앉은 입술에 눈길이 멈추고 묘한 죄책감과 쾌감이 지나갔다. 발소리에 집중하는 지수는 자신과 맞붙은 센티넬의 눈치를 살필 여력따위 없어 원우는 찢어진 얇은 피부에 손쉽게 입술을 얹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이 원우를 향했다. 관심이 받고 싶은 건가, 홍지수한테. 원우는 언뜻 스친 성찰에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커졌다가 찡그려졌다가 곤란한듯 눈썹을 늘어트리는 모습에 손가락이 저려온다. 이상해지고 있었다. 어깨에 올라오는 지수의 손에 저릿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


 "자고 가도 돼?" 




 뻔뻔한 질문. 한 편으론 너무나 의외인 질문. 원우는 자신도 몰래 제 입에서 나온게 아닌가 싶었다. 돌아오는 내내 말없이 걸었던 지수가 원우의 방 문 앞에서 저런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고개를 기웃했지만 뒤를 돌아 저를 보는 것은 지수가 맞았다. 잠시 말없이 서 있자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네 방에서 자고 가도 되냐고."




 조용히 떨어지는 말이 또렷해 원우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간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다. 이어진 감정은 우울함을 말하는데, 겉보기에는 짜증이 조금 난 평소의 지수다. 보안실에서 입을 맞추는 순간부터 한 대 얻어맞을 준비까지 한 것 치고는 삼삼한 결과다. 찝찝한 기분이 마킹 전 지수를 대할 때 같았다. 원우는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발을 뗐다.
 원우가 방으로 들어오자 스스럼없이 원우의 티를 펼쳐보던 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이미 바지는 벗어던지고 없다. 마른 다리가 훤하게 드러나 원우는 부엌으로 슬쩍 몸을 피했다. 언뜻 비치는 허리춤보다는 다리의 멍이 훨씬 나았다. 자신이 남긴 멍을 볼 때마다 이상해지는 기분을 원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옷 좀 꺼냈어. 입어도 되는 거 맞지?"
"아, 네. 먼저 씻어요."
"응, 고마워."




 지수가 사라지자 그제야 부엌에서 나와 침대에 걸터앉는다. 남색 시트가 구겨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등을 뉘였다. 지수와 오래, 깊이 접촉해있어 몸은 한없이 상쾌했지만 머리 속은 안개가 자욱했다. 천장만 바라보며 신발을 벗고 꿈틀꿈틀 슬리퍼를 신는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허연 천장이 울렁거렸다. 생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시작됐다.
 지수의 계획을 망치고 싶다던가, 위험한 상황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수와 닿지 않으면 안될만큼 심각한 상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망가진다. 지수와 함께 있으면 이성의 끄트머리부터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지수의 몸에서 발견되는 흔적들에 두려움과 애착을 느끼며 동시에 그 날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놓아버린 이성의 실낱으로 남아 작은 파열음을 내며 끊어지는. 환하게 휘어지는 눈과 입술보다 굳은 표정이나 시퍼런 멍에 더 크게 반응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섹스라고 하기엔 맹목적이었던 마킹을 떠올리게 하는 그 무언가들. 그 무언가들만 사라진다면, 더 이상 이상해지지 않을 테고...


-


 복수는 종종 스스로를 징벌이라 칭한다. 뻔한 거짓말로 선한 양심을 가장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수의 복수는 정직했다. 투명한 복수는 원우를 흔들었고, 그 복수의 실행자는 원우를 뒤집어 놓았다. 원우는 어슴푸레한 새벽에 눈을 떴다. 눈 앞엔 지수의 잠든 얼굴이 있다. 
 모두의 핏빛 자오선. 연한 어둠 속을 서늘하게 비추는 붉은 숫자를 더듬었다. 지수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눈 뜨는게 제일 힘들었어. 말라붙은 피 때문에 속눈썹이 이렇게, 붙어서는. 눈물에 축축하게 피가 녹아내려갈 때 쯤에나 시야가 트였지. 가장 먼저 보인 건 하늘.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 그 하늘 아래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고, 살아있는 내가 있었고. 


 지수를 지나간 것들이 원우의 새벽을 무너뜨린다. 축이 기울고 또 기우는게 느껴지지만 눈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베개도 없이 웅크린 지수의 미간이 움찔거린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안쓰러워 지수의 머리를 들고 조심스럽게 팔을 끼워 넣었다. 몇 번의 웅얼거림 이후에 동그란 이마가 마른 가슴팍에 닿았다. 잠에 빠진 숨소리가 나지막하게 심장 박동을 조각낸다. 소리없이 연주되는 음악. 촘촘해지는 새벽의 공기. 낯선 기분을 거둔 아늑한 감정이 쏟아지고 원우도 눈을 감았다. 


/ 사랑, 살아있기만 하다면 그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그러한 사랑은 고독한 자에게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씁쓸한 숨에 취한 원우의 방백은 잠과 함께 무너졌다. 




5
 몇 년 만의 외출이었다. 원우의 사적인 외출은 보통 순영의 제안으로 이루어졌고, 순영의 가이드가 들어온 뒤에 순영은 굳이 원우가 꺼리는 외출을 권하지 않았다. 제어 팔찌가 싫어, 무심하게 뱉는 말은 꽤나 진심이었다. 그런 원우가 가이드와 함께 외출이라니. 순영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가이드와 함께 사라졌다. 
 센티넬의 휴식은 일괄적으로 이루어진다. 매달 몇 째주는 무슨 팀의 휴가, 매주 무슨 요일은 무슨 팀의 외출이 있었다. 원우의 방해가 있던 와중에도 지수는 박서진의 가이드가 센터 내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치까지 확보했다. 그리고 오늘, 익숙하게 침대에서 대화를 나누다 외출 이야기를 듣곤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단체 외출이라니, 잘 됐다! 하곤 엉겁결에 일어나 졸린 눈을 끔뻑이는 원우를 이끌었다. 우습게 뜬 원우의 머리가 붕붕, 걸음마다 들썩였다. 




"어떻게 가는지는 알아요?"
"아니, 너는 알아?"




 지수가 베이지색 코트에 손을 꽂아넣고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자 원우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어디서 나오는 여유인지. 덜 마른 머리를 털었다. 공기가 퍽 쌀쌀하다. 입김을 뿜으며 눈을 빛내는 지수의 옆에서 걸음을 맞춘다. 미국에서 오자마자 센터에 갇혀지냈으니 바깥 구경이 즐거울 법도 하다. 날이 서있는 지수가 아닌 어딘가 한껏 풀린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에 원우의 입술도 호선을 그었다. 거기 아니에요, 맹하게 옆길로 새려는 지수를 붙잡고 버스 정류장에 멈춰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산한 버스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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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오후에도 사람이 많은 번화가였다. 꽁꽁 숨겨놓은 것 치고는 번잡한 곳에 있네. 자꾸만 다른 곳으로 사라지려는 지수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놓고 사람들 사이를 박박 통과한다. 케이크 가게며 쥬얼리샵이며 할 것 없이 멈춰서는 지수 덕에 속도는 더뎠다. 입까지 헤 벌리고 높은 건물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점점 벌어지는 입술이 우스웠다. 입가에 눈길을 뺏겼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큼큼,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마른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미국에는 이런 거 없나?"
"음... 있는데, 나는 잘 못 가봤어. 와, 이게 뭐야?"
"마카롱이요."
"이런 건 처음 봐. 장난, 장난감 같다."
"단거 좋아해요? 먹어볼까?"
"응, 먹을래."




 알록달록한 마카롱 진열대에서 눈을 못 떼는 지수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갔다. 단출한 가게 안은 너덧의 사람으로도 복작거렸다. 곧장 계산대로 가는 원우와 달리 지수는 여전히 주변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여기 있어요. 연보라색 케이크에 시선을 뺏긴 지수에게 당부했다. 친절한 표정의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원우를 맞았다. 마카롱은 순영을 따라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다. 혀가 아릿하도록 단 맛이 났고 다시는 먹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쏠트 카라멜하고, 커피 좋아하니까 커피랑... 피스타치오는 싫어하나? 눈으로 마카롱을 훑던 원우가 지수 쪽을 돌아봤다. 




"피스타치오... 아, 정말."




 무슨 애도 아니고. 그새 사라진 지수에 원우가 뒷목을 주물렀다. 아직 은은하게 흔들리는 도어벨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대충 사과의 말을 던지고 문을 민다. 다행히 바로 길 건너편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또 뭐에 홀렸는지 뻔하게 보였다. 아쿠아리움, 파란 고깔모자를 쓴 돌고래 앞에서 멈춰있던 지수가 뒤를 돌아 원우를 봤다. 몽글몽글, 지수를 따라 뿜어지는 감정에 원우는 웃으며 얼굴을 쓸었다. 거기서 기다려요. 내가 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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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푸른색이 덩어리져 지수의 얼굴을 색칠했다. 부드러운 헤엄을 눈으로 좇으며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 역시 심해의 색으로 물든다. 고개를 돌려 유리 너머를 응시했다. 수많은 눈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췄다. 
 원우는 바다를 좋아했다. 센티넬이 되기 전, 어린 원우의 방학은 늘 바다에 쏟아졌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가 쓸려내려가는 기분이 좋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젖어 머리끝부터 서늘해질 때의 소름이 좋았다. 턱끝까지 들어차 숨막히게 하는 파도가 좋았다. 물고기 비늘처럼 빛나며 자글거리는 수면이 좋았다. 눈을 뜨면 어둡게 들이차는 깊은 바다가 좋았다. 그 짭쪼름한 물냄새와 비린내마저 좋아했다. 햇살에 말라버린 물기, 그 후에 나타나는 소금 역시 우습도록 좋았다. 심장이 축축하게 그리워졌다. 우울함과 산뜻함이 동시에 밀려오고 지수의 눈이 원우를 향했다. 




"바다, 좋아하는 구나."
"응. 정말 좋아했어요."




 좋아, 했어요. 묘하게 정정된 말이 약간은 서글펐다. 머리가 둥근 물고기가 유리 근처로 다가왔다. 지수는 창에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눈앞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에 지수의 얼굴에 사근한 웃음이 피었다.




"나는 바다 한 번도 안 가봤어."




 부드럽게 유영하는 지느러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수가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항상 가보고 싶었어. 바다가 아니더라도 물로 가득찬 곳에. 숨이 잠길 정도로 많은 물이 있고, 쉽게 넘쳐버리기도 하는. 무신경하게 뱉어지는 말은 오늘 내내 보았던 지수의 들뜬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아직도 푸른빛이 영롱한 눈동자는 물살을 가른다. 
 닮았네. 문득 생각했다. 홍지수는 물과 닮았다. 찬란하게 햇빛을 쪼개는 해수면은 새하얀 미소고, 아득한 심해의 어둠은 썩어들어간 심장이다. 복수라는 거대한 불꽃에 끓어 달아올랐지만 먼저 무언가를 태워버리는 법은 없는 물. 서서히 적셔 찢어버리는 것이다. 까마득하게 잠겨 죽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엔 진짜 바다 가요."
"그럴까?"




 무심하게 건넨 말에 지수가 화색을 띄고 말했다. 원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적으로 뇌까린 말이지만 진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눈부신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지수의 울음이 바다로 떨어지는 것이 보고싶었다. 가요, 지수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긴다. 잠깐 그런 걱정이 들었다. 지수가 바다에서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느낄 새도 없이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지수는 너무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지. 갑작스럽게 뇌까린 말은 나직했다. 원우가 지수의 옆얼굴을 바라봤지만 지수는 원우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맞닿은 피부의 온기를 느끼며 원우는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느리게 가라앉는 지수, 하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익사할 만큼 깊은 바다가 그 어디 남아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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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하게 거창한 오피스텔은 복도부터 화려했다. 느리게 복도를 가로지르면 원우는 고갯짓으로 씨씨티비를 망가트렸다. 미국에선 맨날 꽁꽁 싸매고 다녔는데, 너랑은 가드 하나 기절시키면 끝이네. 날아다니는 파편들을 눈으로 좇으며 지수가 중얼거린다. 금색 문 몇개를 지나고 원우의 걸음이 멈췄다. 여기 맞죠?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곤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도어락을 풀었다. 마른 침을 삼키는 원우와 달리 지수는 혼연하다. 
 고급스러운 내부는 사람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갈한 거실을 지나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히고 다녔다. 쓸모가 확실한 방들은 쓰여지지 못하고 있었다. 원우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자 지수도 눈썹을 늘어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 방이었다. 문고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돌아갔다. 열린 방 문 너머에는 커다란 침대 하나가 있었다. 침대가 큰 건지 그 침대를 의지하고 있는 인영이 작은 것인지. 원우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문턱을 넘지 못 했다.




"쟤가, 그 가이드에요?"
"...그런가 봐."




 곤히 잠든 얼굴은 잔뜩 앳된 것이 열댓 살을 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면 포동포동해야 할 볼도 수척했고 마른 손목으로는 커다란 바늘을 통해 누런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게? 원우가 멈춰 선 지수의 귀에 속삭였다. 이마를 덮는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린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어떡하긴, 죽여야지."
"진심이에요?"
"응."
"그냥 아동 가이드 착취로 엿 먹일 수 있잖아. 적어도 오십 년은 감옥에서 썩힐 수 있어요."
"원우야, 아파."




어느샌가 지수의 팔뚝을 꾸욱 쥐고 있었다. 찡그린 얼굴을 보자 살짝 정신이 들었다. 손을 내리고 이마를 짚는 원우의 손목을 지수가 가볍게 쓰다듬 듯 잡는다. 원우야...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눈이 접히고 더 튀어나오는 통통한 애교살이 한없이 선해 보인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어 약간은 반색을 했다.




"그게 무슨 복수야."




 해맑은 미소를 뒤집어쓰고 그렇게 말했다. 어떤 화사함이 무색하게도 지수가 걸어온 길은 잔인하다. 따스한 손으로 잡힌 손목이 아려온다. 알아 들었어? 다정하게 다가오는 물음을 받아들이는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멍하니 아이에게 다가가는 지수를 관망한다. 복수, 정의는 홀가분하게 씻어내린 맹목적인 의도에 온몸이 뻣뻣해졌다. 
 이불을 걷고 마른 몸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리구나. 지수가 아이의 볼을 쓸어내린다. 부드러운 접촉에 살며시 눈이 뜨였다. 안녕, 작게 인사하는 소리에 원우의 굳은 머리가 다시 제정신을 찾았다. 예쁘게 웃는 모습에 혹시, 하는 마음이 들지만 더는 속지 않는다. 속지 못한다. 성큼성큼 걸어 아이의 목으로 다가가는 지수의 손을 낚아챘다. 지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가라앉은 눈을 마주한다. 




"원우야."
"...안 돼요."
"얼른 놔."
"꼭 죽일 필요 없잖아."
"원우야, 내 복수야."




 얼어버린 표정의 지수는 어느 때보다 형형한 눈빛을 했다. 원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풀어버린다. 두려움에 질려 창백해진 아이를 지그시 바라본 지수가 가는 목에 손을 올렸다. 미안, 팔에 힘을 불어넣으며 지수는 살짝 속삭인다. 아이는 숨을 앗아가는 지수를 올려다봤다. 눈을 감고 입술을 꾹 문 모습이 괴로워 보인다. 불쌍한 사람이네,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순간 목을 짓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유독 가볍게 느껴지는 몸이 풀썩 쓰러졌다. 


-


 몇 번 눈을 깜빡거린 지수가 원우의 얼굴을 발견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몸이 휘청거린다. 눈에는 잔뜩 핏발이 서 살벌한 기색이었다. 원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수를 피하지 않는다. 커다란 눈이 물기로 번들거린다. 원우의 앞에 서 그 축축한 눈을 부라렸다. 




"너..."
"걔는 알아서 다른 곳에 잘 보냈어요. 박서진은 절대 못 찾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왜, 네가..." 
"그리고 박서진 죽이는 건 내가 해요."
"뭐?"
"가이드가 없어도 센티넬은 센티넬이잖아. 위험해요."
"네가 씨발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니가 뭔데!" 


 화가 난 건지 숨이 턱 끝까지 와 있다. 갑자기 험한 욕이 튀어나오며 말이 툭툭 끊긴다. 감정이 격해지면 영어를 쓰는구나 생각하면서도 시뻘게진 눈가가 안쓰럽다. 원우는 지수의 볼을 굴러갈 눈물을 닦아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다정하게 굴기에는 아직 해결할 감정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언제든 그쪽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죠." 
"이 복수는 내 복수라고 했어. 간섭하면 죽여버릴 거야."




 갈가리 찢긴 목소리와 함께 까칠한 악도 후두둑 떨어졌다. 너한테 들키면 안 됐어. 내가 바보였어. 센티넬을 믿은 내 잘못이지.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는 영어는 악을 눌러 삼키는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숨이 모자라 말을 멈춘다. 원우의 귀가 뜨거워진다. 하얀 이가 입술을 짓누르고 잇새로 신경질적인 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뜨거운 눈가를 식혀주려는 원우의 손길을 쳐내곤 눈을 가렸다. 그대로 잠깐 눈을 덮고 심호흡을 한다. 울분이 느껴지는 숨이 원우와 지수의 사이를 벌려 놓는다. 




"네가 날 통제할 수 있다고? 웃기지 마. 넌 절대 못 그래."




꾹꾹 내뱉는 말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웠지만 벌겋게 변한 눈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울음과 부아가 가득 찬 얼굴이 파르르 떨린다. 자잘한 근육이 경련하며 표정을 바꾼다. 새파란 웃음이다. 




"날 사랑하잖아."




6
펑, 폭발음과 함께 원우의 시야로 매캐한 연기가 들어찼다. 손짓 한 번으로 부서지는 것들을 바라보다 보면 또렷한 허망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너져내리는 벽에 시선을 고정한 원우는 텅 비어버린 머릿속을 애써 채워 넣는다. 지수와 연관 없는 무언가를 생각하려 애쓸수록 더더욱 지수로 들이차는 회로가 원망스러웠다. 제 일을 해결하고서야 터벅터벅 걸어온 순영이 원우의 어깨를 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가자, 순영의 뒤를 따라 들어선 거리엔 먼지가 자욱하다. 종종 적대적인 눈빛을 띤 사람들이 원우와 순영을 지나쳤다. 순영은 머쓱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리지만 변명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헛헛한 웃음이 튀어나온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자 순영이 뒤를 돌아봤다.




"오늘 아침에 수치 몇이었냐, 너."
"...칠십?"
"접촉은 잘 하나 보네. 안색이 형 없을 때보다 구려서 팔백 쯤 될 줄 알았는데."




 구리긴, 또 실없는 웃음을 토하지만 끝 맛이 텁텁한 건 숨길 수 없다. 순영의 까만 뒤통수를 쳐다보며 느려지는 발걸음을 애써 재촉한다. 싸웠냐? 뻔한 질문을 듣자 입이 썼다. 싸우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렇지. 건조하게 대답한다. 흐음, 애매한 반응을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는다. 조용히 걷는 순영에 원우는 다시 끈적한 생각의 미로를 세웠다.


-


 계획은 지수의 손안에서 유순하게 굴러갔다. 박서진은 가이드가 사라진 뒤 한 달 내내 센터 내에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자신에게 맞는 가이드를 찾는 데에도 실패한 듯했다. 몰래 병원에 틀어박혀 목숨만 부지하고 있겠지. 자신이 학대한 어린 가이드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을 테니. 그 정도는 지수의 언급 없이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지수는 종종 원우의 방으로 찾아왔다. 원우가 조금 어지럽다고, 위험하다고 느낄 때쯤 나타나 조용히 몸을 섞고 다시 돌아갔다. 지수가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돌아가면 원우는 시꺼먼 늪 속으로 발을 디뎠다. 심연의 늪은 우울한 원우를 잘만 받아주었다. 


  마찰음과 간헐적으로 퍼지는 숨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지수는 까슬한 셔츠가 쓸려올려가는 불편함을 무시하며 침대 옆 단정한 탁상 등에 눈길을 줬다. 종종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는 것 말고는 늘어진 인형 같았다. 착실히 자신을 무시하는 지수에 원우는 가라앉는 기분으로 움직였다. 의식적인 허릿짓에도 사정감은 몰려왔다. 지수도 끝이 다가오는지 시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곧은 쇄골에 코를 묻고 사정했다. 옅은 바디워시향이 났다. 성기를 빼고 지수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일어나려는 듯한 몸짓에도 원우는 지수를 가둔 몸을 치우지 않는다. 
 고개를 더 깊게 묻었다. 바디워시향과 지수의 체향이 동시에 밀려온다. 날카롭지만 어쩐지 아늑한, 따뜻한 향. 원우가 이를 악물었다. 지수는 가만히 천장을 본다. 습관이 된 체념은 다정함은 배제한 채 다가왔다. 눈을 도르르 굴리다 고개 숙인 원우의 귀를 봤다. 동그란 귓바퀴가 온통 붉다. 흐, 짓씹힌 소리가 작게 터졌다. 동시에 지수의 쇄골로 눈물이 떨어진다. 툭, 투둑, 불규칙적으로 곤두박질치는 방울은 소리도 없다. 




"...울어?"




 놀란 목소리가 엇나간다. 원우야, 울어? 다정해진 울음에 원우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도 벌겋게 익어 차가운 인상이 한순간에 안쓰러워졌다. 눈을 깜빡이자 지수의 볼이 원우가 떨군 눈물로 젖었다. 팔을 들어 처연해진 얼굴을 손으로 더듬는다. 그 손길을 걷어낼 생각도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지수를 흐릿하게 내려다봤다. 신기한 것을 보는 눈빛. 몽롱한 웃음이 살금 퍼진다. 




"진짜 우네." 




웃음기 섞인 말에 의식이 돌아왔다. 얇은 손목을 잡아 끌어내리곤 겹쳐진 몸을 뗀다. 지수도 누워있는 상태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밀려난 이불을 부스럭 거리며 그러모았다. 무릎을 세워 턱을 기댄 자세로 원우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얼굴에 흥미로움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원우야."
"...네."
"나 때문에 운 사람."
"..."
"네가 처음이야."
"웃기지 마요."
"진짜래두."
"웃지도 말고."
"원우야."
"왜요."
"난 널 죽일 거야."
"허-."




방긋방긋 실없이 말하는 지수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벨트를 찬다. 왜 운 거야, 진짜.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힘들어하고 있었나 보다. 자꾸만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 말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눈도 말도 피하는 지수는 무서웠다. 영영 봐주지 않을 것 같아 무섭고 외로웠다. 눈물의 이유를 깨닫자 붉은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아는지 모르는지 지수는 고개까지 흔들거리며 말을 잇는다. 




"너한테 화났었는데 다 풀려버렸어."
"...그건 다행이네요."
"응, 그래도 박서진은 내가 죽일 거야."




 다 쓴 콘돔을 처리하는 손이 잠깐 멈칫한다. 대답이 없는 원우에 지수가 미소를 지었다.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소리 내어 웃자 약하게 심통이 난 얼굴로 지수를 돌아본다. 흐응, 장난스러운 비음이 흘러나온다. 너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해사한 표정에 원우는 또 눈을 피했다.




"그러니까, 죽일 때 옆에 있어 주라." 
"네?"
"너라면 옆에 있어도 좋을 것 같아서. 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하는 복수, 로맨틱하잖아."




 살포시 휘어지는 눈이 원우를 향하자 머리가 어질하다. 가디건을 다시 걸고 침대로 다가갔다. 올려다보는 지수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꾸욱 도장을 찍 듯 다른 움직임 없이 입술만 맞댄다. 꺼슬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겨울을 말한다. 
 천천히 얼굴을 떼자 웃음기 맺힌 낯이 더 활짝 펴졌다. 허리를 펴는 원우의 볼을 잡고 다시 짧게 키스한다. 감은 눈으로 지수의 입술을 받은 원우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키스할 때 눈 감는 거 처음 봐, 중얼거리자 원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시작한 키스가 처음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입천장을 간질인다. 




"박서진은 언제 돌아올까."
"24일, 크리스마스 축하연엔 참석해야지. 약을 먹든지 해서라도."
"언제, 갈까요."
"이브 밤, 파티 도중이겠지?"




 작년 크리스마스 파티를 떠올려본다. 커스터드푸딩이 참 맛있었는데. 지수가 좋아할 것 같은 맛이었다. 또 어땠더라, 시끄럽게 떠드는 순영의 옆에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다가 약발이 떨어져 가만히 푸딩이나 주워 먹은 기억밖에 없다. 푸딩 말이지.... 어느새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아있다. 어깨에는 지수가 머리를 기댔고, 창문을 내다보니 눈이 오는 것 같다. 하얀 불빛이 덩어리진 어둠을 갉아먹는다. 잠에 빠져 떨어지는 고개를 원우의 손이 고정시켰다.




"사랑해요." 




 입술이 바싹 말라버렸다. 감은 눈을 덮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듯하더니 이내 고요해진다. 




"날 사랑해요?"
 


 돌아오지 않는 대답.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대답. 원우는 다시 창밖을 봤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7
윤이 흐르는 더비 슈즈가 복도를 울리며 걸었다. 여덟시에 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오랜만에 찬 금색 시계의 긴 팔은 원을 반으로 쪼개 넘어가고 있다. 설마, 설마... 걸음이 빨라지고 규칙적인 소리의 사이가 좁아진다. 원우는 검은 자켓이 휘날리도록 다리를 움직였다. 




"홍지수!"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열리는 문을 젖혀버린다. 지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자 원우는 뒤를 돌아 다시 발을 뗐다. 어디로 갔을까, 벌써 박서진한테... 밭은 숨을 쉬며 생각을 이어나가려는 원우를 바닥을 기는 목소리가 붙잡았다. 나 여기 있어, 나지막하다 못해 사라질 것만 같다. 
 화장실 바닥은 온통 피바다였다. 홍지수의 피, 그때 완 달랐다. 지수는 자신의 피 위에 지친 듯이 누워있었다. 입가가 젖어있었다. 나른하게 접힌 눈이 하얀 천장을 비추다 원우의 놀란 얼굴을 담았다. 또, 웃었다. 시도 때도 없이 피어나는 미소에 원우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나곤 했다. 늘 무언갈 가리는 미소였으니까. 




"뭐가 좋다고 계속 웃어."
"옷 예쁘게 입었네."
"빨리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요."
"잠깐만, 나 아퍼."
"왜 이런 거야, 언제부터 이랬어요."
"야아,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더 죽을 상이야."
"형이 죽으면 나도 죽잖아."




피 묻은 얼굴로 키득키득 웃었다. 원우야, 어떡하지. 




"난 너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지수는 엘에이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했다. 목적을 위해 변하고 희생하고 망가지는 사람들. 그중에는 가이드가 되려는 부류도 있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몸이 망치는 과정이었다. 지수는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가이드가 된 친구를 보며 찌푸린 웃음을 지었다. 그 친구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가이드가 되려 했다. 한심했다. 내가 가이드가 된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 복수를 위해서겠지,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지수가 맞춰야 할 센티넬은 S급이었다. 공명이 넓을수록 가이드가 되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강한 사람을 형 편으로 만들 수 있고, 그러다 사랑하게 되면 좋은 거죠, 뭐. 동그란 안경을 추켜 올리며 조언하는 지훈에게 지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가올 고통이 무서운 것보다 누군가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 싫었다. 원하지 않는 상대와 의무적인 닿음을 이루는 것도 싫었다. 최악은 내 복수가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 지수는 벽을 치는 법을 배웠다. 사랑받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원우는 날 사랑하니까 걔의 관여도 결국 내 것이잖아. 서투른 합리화는 다정해진 원우의 눈빛으로 채워진다. 날 사랑해요? 귀에서 맴도는 낮은 목소리에 지수는 마음속으로 마저 끝끝내 답하지 못 했다. 널 사랑하는 걸까, 보다 내가 널 사랑해도 될까. 나는 널 죽일 건데. 널 죽이고 나도 죽을 텐데.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까? 


-


정신을 차린 지수는 낯빛이 어두워진 것 말고는 멀쩡했다. 멀쩡해 보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반질한 외모 안으로 썩어있을 상태를 원우는 차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피 묻은 옷을 물에 담가놓는 게 손에 익어 보여 더 입이 썼다. 연회장으로 바로 가야겠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새 셔츠를 찾는 지수의 맨몸은 마르고 얼룩지다. 




"너는 피 안 묻었어? 셔츠 확인해 봐."
"...괜찮아요. 얼른 옷 입어요."
"응. 기다리게 해서 미안." 




 어차피 또 묻을 텐데. 배 쪽을 물들인 핏자국을 대충 가리고 대답했다. 한참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더니 단정한 정장에 보타이까지 하고 나타난다. 타단- 다분히 미국인스러운 추임새까지 넣으며 문 앞에 선 원우의 팔에 손을 올렸다. 에스코트~, 완벽한 발음으로 던지는 어이없는 말에 원우도 웃음이 터졌다. 




"가시죠." 




어느 때보다 발랄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둘은 걸어나갔다. 비록 지수의 자켓 품 속엔 새까만 베레타 하나가 숨겨져있고, 원우의 셔츠엔 더 퍼져갈 새빨간 피가 묻어있지만, 충분하게 완벽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


 복도에선 우아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소지품을 검사하겠다는 가드를 가볍게 쓰러트렸다. 둘의 길을 저지하는 사람들을 터트려 폭죽으로 썼다. 죽어가는 양복들 사이에서 걸음걸이는 여전히 경쾌했고 표정은 예수의 탄신을 기뻐하는 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종종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부드러운 호선을 마주하면 다시 앞을 봤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원우가 먼저 입을 맞췄다.




"크리스마스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
"바다는 어때요. 바다 보고 싶다면서."




 좋지. 지저분해진 복도 벽을 응시하는 지수의 머리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켠다. 몇 걸음 더 다가가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장 문을 열었다. 별을 잘게 조각 내 뿌려놓은 것처럼 온통 눈부셨다. 별보다는, 음, 다이아몬드에 가깝다. 화려하고 극적이고 어느 정도 인위적인 게. 복수의 클라이맥스에 딱 어울린다. 
 둘에게는 망설임도 거칠 것도 없었다. 번쩍이는 바닥을 레드 카펫처럼 밟으며 쏟아질 것 같은 샹들리에 아래에 섰다. 연회장의 한가운데서 등을 맞대고 선다. 지수가 새끈하게 윤을 낸 베레타를 꺼냄과 동시에 원우가 눈을 감고 팔을 펼쳤다.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바닥을 빈틈없이 채운 형형색색의 파편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쓰러져 있었다. 
 알았다, 이건 우리의 복수다. 원우의 힘을 확인한 순간 지수는 또다시 체념했다. 그 말이 맞았다. 포기하는 것이 습관이 될 거라고. 지수는 자신을 보는 눈을 피하곤 우뚝 솟아있는 훤칠한 얼굴에게 다가갔다. 영웅을 사칭하다 보니 퍽 위풍당당해진 모습으로 서있다. 




"내가 목표 군. 가이드를 죽인 것도-"




 망설임 없이 날아간 총알은 허벅지에 꽂혔다. 묵직한 신음을 뱉으며 쓰러지지만 지수의 총구는 여전히 하나의 인영만을 향한다. 탕-, 이번엔 허벅지를 붙잡은 팔뚝. 처절한 비명은 지수의 손을 내리지 못 했다. 웅크린 몸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춘 지수가 박서진의 귓가에 다가간다. 나긋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원우의 귓가에 닿지 못하고, 박서진은 그렇게 굳센 인간이 아니었다. 감사, 짧은 인사는 원우에게 도달할 만큼 컸다. 원우가 뒤를 돌아보자 박서진의 자켓을 뒤지는 지수가 보였다. 곧 묵직해 보이는 무언가를 흔들며 몸을 일으킨다.




"줬으니까, 이제 살려-"




 탕, 이번엔 길지도 않은 총성이었다. 빠르게 심장을 뚫는 소리에 지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발을 돌려 원우에게 돌아온 지수가 원우의 뺨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입술을 뗄 때마다 한마디씩 건네는 통에 넋 놓고 지수의 얼굴만 봤다. 멀어지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일그러지는 표정도 그래서 볼 수 있었다. 어딘가 다급하고, 처연하고, 미안해 보였다. 뭔가 있구나. 떨어진 사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다가오는 지수의 어깨를 붙잡는다. 




"하고 싶은 말, 있지."
"...."
"뭐예요."
"저번에 말했어. 너는 제대로 안 들었겠지만."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널 죽일 거야."




 지수가 속해 있던 곳, 센티넬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지수의 복수를 도와주던 곳의 궁극적인 목표는 센티넬의 몰살이었다. 지수 역시 한국 센티넬의 멸살을 담보로 복수를 위한 지원을 받았다. 한국은 한 번에 죽이기가 쉬울 거야. 형이 죽이려는 사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스위치만 구해서... 지훈의 설명을 들을 때만 해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수 역시 센티넬이 죽을 만큼 싫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센티넬이었으니까. 원우의 혼란스러운 눈빛 따위 예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게 내 복수의 완성이야."
"...근데 그걸 왜 말해줘. 그냥 죽이지."
"네가 막아달라고."




 날, 죽여달라고. 지수는 여느 때처럼 웃으면서 얘기했다. 마치 그래, 바다에 가자.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복수의 매듭을 이런 식으로 짓고 싶지 않은데, 끝을 보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거든. 날 사랑하는 네 손에 죽으면 끝없이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였다. 뱃속부터 차오르는 걸쭉한 핏기에 새벽에 눈을 뜨면 늘 잠든 원우를 바라봤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다 잠에 축 늘어진 하얀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술을 비볐다. 이 손에 죽어야겠다. 이 손으로 다른 사람의 숨을 끊는 건.... 지수가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분명 지수는 누구의 손에든 목이 졸릴 것이었고, 더 신빙성 있지만 끔찍한 경우는 원우가 지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싫어, 차라리 네가 날 죽여줘. 




"이러려고 날 데려왔어요? 자기 편하게 죽여달라고?"




 지수는 원우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먹먹하게 말을 이었다. 이걸 누르면 센터에 속한 센티넬은 다 죽어. 여기, 붉은 숫자가 차오르고 터져버려. 이걸 내가 누르지 못하게 죽이는 거지. 




"그럼 너는 영웅이 될 테니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다른 가이드는 금방 구해질 거야. 어차피 난 인공적인 가이드였고, 대체품에, 오래가지도 못 했을 테니까."
"사랑해요. 처음이에요. 다른 가이드는 사랑하지 못할 거야. 형은 대체품이 아니에요." 
"원우야, 그게 사랑인 것 같니?"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사랑이 아니야, 작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지수는 괜히 숨을 벌린다. 




 "유대라는 게 말이야, 생각보다 아늑해서 자꾸만 의지하게 만들지. 그 관계에 집착하게 되면서 다들 착각해, 사랑이라고. 특히나 너 같은 외로운 아이는..."




 지수는 '외로운'을 유독 서글프게 발음했다. 원우의 차가운 볼을 더듬으며, 마지막 음을 가파르게 내렸다. 눈썹을 축 늘어뜨린 지수는 안쓰러운 미소를 짓는다. 얼굴이 일그러질 것 같아 금새 고개를 숙였다. 사랑이 아닐리가 있겠는가. 지수는 위선적인 자신의 말에 스스로도 코웃음을 쳤다. 전원우만큼 곧은 사랑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런 사랑을 받은 적도 없었다. 때때로 전해져 오는 감정은 지수에게 벅찰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 단순하고도 복잡한, 그리고 우습도록 의미없는 소모에 지수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샹들리에는 빛나고 있었고, 오래된 재즈 음악 역시 끊기지 않았다. 쓰러진 이들은 더미를 이루어 한 발만 움직여도 금새 발에 치일 정도 였다. 형형색색의 쓰레기에  둘러싸인 듯 하다. 원우는 달콤쌉싸름한 표정의 지수를 마주하고 있다.


 왜 매번 웃어요. 나는 형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데.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이 뜨거워지고. 나도 축축한 눈물로 젖은 볼을 감싸고 싶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편안함이 아닌 어딘가 불편한 사랑을 지탱하기 때문에. 처음이지만 알 수 있어. 이건 사랑이에요. 가느다란 미동도 없는 눈빛을 원우는 지수에게 보낸다. 지수는 원우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다. 투명한 광이 부딪히는 바닥에 눈을 꽂고 다시 말했다. 




"나는 첫사랑이 아니야, 그냥 첫사람이이야."




 완전하게 부정당한 사랑은 갈피를 잃고 터져나온다. 원우는 말을 잃고 지수는 증오를 얻는다. 배신감, 억울함, 슬픔, 탈력감... 순식간에 지수에게 파도처럼 넘어온다. 날카로운 감정이 쏟아지는 동안 원우는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지수의 손에 들어간 검은 스위치를 뺏어들고 망설임없이 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지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면면히 이어지는 파도가 이루는 바다, 그 거대한 몸체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토록 넓고 깊은 바다, 우리가 익사할 만큼 깊은 바다. 까마득한 사랑의 조각이 감정이 되어 몰려온다. 밀물처럼 쓸려온 조각은 짠맛을 간직한 채 지수의 바닷가로 향했다. 이 모든 증오 역시 사랑의 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갈라진 슬픔을 적시고 만다. 복수의 환희는 손끝으로 삼켜진지 오래였다.




 원우의 해피엔딩은 반쯤 이루어졌다. 마주하는 얼굴이 소금기 가득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수치가 새겨진 피부 아래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은 말 그대로 '터질듯이' 뛰며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홀 안이 옅은 열기로 휩싸인다. 원우는 입을 꾹 다물고 지수의 눈물을 들여다봤다. 헐떡이는 울음 소리에 코 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외면한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요."
"...그럴 수가 없어."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말아요."
"...원우야." 




 바다에 잠긴 얼굴이 다가온다. 원우야, 원우야- 훌쩍이는 소리 하나 없이 눈물만 죽죽 흘렸다. 열화를 두른 듯한 원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도 그랬다. 뒤집히는 심장이 판판한 가슴팍과 마주한다. 커다란 울림에 지수는 이제 소리내어 울었다. 이러지 마요, 지수의 팔을 뜯어내려는 손길이 급박하다. 




"복수 성공했잖아. 이제 살아야지."
"네가 성공 시켜 줬잖아. 이제 죽어도 되지."




원우의 마른 등을 쓸며 대꾸한다. 휘어진 눈은 웃음과 닮았지만 단단한 슬픔을 울컥 뱉어냈다. 지수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줬다. 열기에 어질해진 원우를 버텨낸다. 열두 시 종이 울리고 첫 폭발음이 들렸다. 팡, 퍼벙, 퍽, 새빨간 피가 튀고 재즈 위로 쌓이는 복수와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낭만적일 수도 있었다. 까슬한 입술이 닿는다. 지수도 원우도 웃었다. 느린 조수와 함께 꾸역꾸역 웃었다. 원우야- 수백번은 부른 이름이 유독 짭쪼름하다. 




"사랑해"




 돌아오지 않는 대답.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대답. 지수는 뜨겁게 녹아 맞붙는 심장을 확신한다. 말도 안되게 깊은 이 감정을 외면하지 못하고 빠져버린 것은 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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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이는 네온사인을 넘어 푸른 목숨들의 일렁이는 춤사위. 거리는 빛과 함께 깨어나 거친 향과 함께 눈을 뜬다. 밤을 도둑맞고 사타구니만이 살아 숨 쉬는 남자들과, 그들을 받아내는 곡선의 여자들도 있다. 연민의 어둡고 습한 바닥을 기는 여자들. 신이 엎질러 놓은 경치, 모두 신경질적이다. 몸을 웅크리고 조심스레 걷는다. 탐욕의 날숨까지 보여주는 거리에서 나는 언제나 서두른다.

 

지저분한 빛으로 촘촘히 엮인 거리의 세 번째 골목, 세 번째 골목의 가장 안 쪽 창. 달의 뒤편 같은 그 곳에 고개를 드밀면 정말 달빛이 문질러 놓은 듯 한 얼굴이 솟는다. 다정한 듯 헛헛한 웃음 한 번. 기다란 손으로 삐걱 이는 창을 열어젖히면 나는 몇 번 어기적어기적 창틀에 몸을 부딪혀가며 통과한다.

안녕, 공기를 부유하는 내 갈라진 인사. 대답은 없지만 개의치 않는다. 전원우는 원래 말이 없다. 어딜 가도 다리가 턱턱 걸리는 세 평짜리 원룸. 흐트러진 이불 위로 몸을 뉘이자 몇 걸음 만에 내게 다가온다.

 

"나와, 이불 갤 거야."

 

, 개어봤자 얼마나 넓어진다고. 툴툴대며 동그란 스툴에 올라앉았다. 하도 낡아 삐거덕거리는 게 또 어디서 주워왔을 게 뻔하다. 원우야, 이거 또 어디서 주워왔어? 무시하는 건지 등을 돌리고 옷을 갈아입는다. 십 년은 입은 것 같은 낡은 청바지가 보여주는 단절 없는 가난의 시간. 잘난 얼굴 말고는 모두 가난하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궁핍하지 않을 때가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전원우는 담담하다. 깊은 가난을 면면히 유구한다. 나라면 억울해서 진작 뒤져버렸을 텐데. 긴 하품이 나온다. 좀 잘까. 전원우는 또 새벽 내내 알바를 할 테니까. 눈이 살살 감긴다. 구멍 난 양말까지 챙겨 신은 원우가 앞으로 온다. 골똘한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콧잔등과 이마에 입을 맞춘다. 생각이 바뀌었다. 오랜만에 전원우의 거대한 일상으로 향한다.

 

 

 

 

 

무대륙의 소년

 

 

 

 

 

전원우를 따라 현관으로 다가가자 무심한 눈이 나를 바라봤다. 따라 오게? , 같이 가자. 내가 빠져나올 때까지 문을 붙잡아주는 상냥함. 도로 거두는 시선은 말한다. 그러던가. 헤헤, 기분 좋게 웃고 커다란 걸음에 맞췄다. 절뚝이는 발에 맞춰주는 느릿한 움직임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전원우와 함께 걷는 거리는 희멀겋다. 홀로 웅크린 몸으로 누빌 때보다 느지막하고, 여유로우며, 가만하다. 어지러운 빛들이 전원우의 커다란 색에 먹혀들어가 잔잔해진다. 절름발이와 가난한 남자는 계속 걷는다.

유리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들어가고 싶은데, 내가 있으면 전원우는 혼나거나, 잘리거나. 이럴 거면 그냥 집에서 잠이나 잘걸 그랬지. 눈을 끔벅이며 후회하는데 원우는 어느새 문을 잡고 기다린다. 눈치를 보다가 형광색 하얀 빛 속으로 몸을 디민다. 익숙하게 조끼를 걸치는 손길이 무심하다. 괜히 불안해 진열대를 정리하는 전원우의 곁을 맴돌게 된다. 나 진짜 들어와 있어도 되는 거 맞아? 너 끝날 때까지 나가 있을까?

 

"나 아침에나 끝나. 얌전히 있어."

 

그냥 집에 있을 걸. 겉보기에도 졸음에 잠겼을 게 분명한 얼굴을 문질렀다. 계산대 안 작은 의자에 몸을 얹혔다. 창고와 진열대를 누비는 전원우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규칙적인 발소리는 자장가, 뭉근한 냄새 사이로 풍기는 너의 냄새는 달콤한 수면제. 목을 긁는 콧노래가 나온다.

 

 

 

새벽의 편의점은 퍽 바빴다. 다른 곳도 그런지, 아님 낮과 밤의 경계가 뭉개진 이 거리에서만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료할 틈 없는 전원우를 바라보는 건 꽤나 흥미롭다. 단단한 듯 부드러운 얼굴의 무뚝뚝함은 그대로인데 한껏 바빠진 손놀림과 낮지만 상냥하게 나가는 말들이 그렇다. 나한테도 그렇게 말해 줘! 한 마디 던져도 기다란 소시지만 하나 던져줄 뿐이다. 조용히 하라는 거지? 나도 다 알아. 급하게 곯은 배 안으로 소시지를 떨어트린다.

사람이 없으면 전원우는 나를 자기 무릎 위에 앉혀놓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졸음을 감수하면 얻을 수 있는 새벽의 묘미. 나는 또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내 어설픈 멜로디에 코웃음을 치기도 한다. 그럼 나는 전원우의 마른 배를 간질이고 전원우는 손끝으로 내 콧잔등을 괴롭힌다. 허한 새벽을 채우는 전원우의 소리 없는 웃음. 어쩐지 감동적이다.

 

 

 

"쟤는 또 왜 여기 들어와 있어! 장사 망치려고 작정했어?"

 

잠에 살짝 걸친 발을 서둘러 뺐다. 눈이 번쩍 뜨이는 호통에 나도 모르게 몸을 낮췄다. 머리가 멍멍하고 온갖 소리가 아득하다. 바보같이 떨려오는 몸. 사장의 목소리에 박힌 건 가시보다는 창살에 가깝다. 그의 발길질은 그보다 더 매섭다. 죄송합니다, 지금 내보낼게요. 사과하는 전원우의 목소리가 울리고 동시에 마른 손이 등을 쓸었다.

 

"놀랐지, 미안해."

 

쭈그린 몸을 다독이며 일으킨다. 잠시만 나갔다 와, 미안. 심원한 목소리가 속삭인다. 아직도 모진 말을 쏟아내는 사장 옆을 지나 원우가 열어준 문을 나선다. 편의점 앞 테이블 앞에선 조용하게 술을 삼키는 사람들. 찬 새벽바람에 역한 냄새가 떠다녔다. 덩달아 메스꺼워져 아까 먹은 소시지를 토해낸다. 몸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새카만 기름도 쏟아졌다. 텅 빈 몸에 한기가 돈다. 눕고 싶다. 다시 오라고 했으니 집으로 가진 않는다.

 

 

 

 

아무 골목에 들어갔다. 바람이 막혀 아까보다 훈훈한 기분이다. 또 졸음이 밀려온다. 내 얼굴과 어둠 사이 아무것도 없다. 빈틈없는 어둠 속에 온통 꽃이 핀 방 한켠을 만든다. 선잠에 들었다. 작은 소리에도 자꾸만 눈이 떠져 깊게 빠질 수 없었다. 간간히 꿈을 꿨다. 희미한 빛이 도는 별들이 다듬은 꿈. 좋은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눈을 감자 이번엔 냄새가 방해를 한다. 칼칼한 연기냄새. 이 골목의 품을 더 빌리고 싶었지만 담배는 싫다. 골목으로 남자들 틈을 비집고 나왔다.

 

목적지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동안 잡다한 생각들이 빈 머리통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이 과거에 대한 것. 미래를 집필하기엔 희망이 부족하다. 까만 밤하늘 틈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머리를 치고 지나가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젖는 건 딱 질색이야. 그래도 비 냄새는 좋다. 비 냄새를 맡으면 원우 생각이 난다. 사실 무엇을 하던 원우 생각이 난다. 전원우는 내가 간간이라도 미래를 쓸 수 있게 해준다. 유일하게 미래를 그리게 해주는 흑연 같은 거다. 함께 적은 과거는 짧지만 미래는 길었으면 좋겠다는 허투룬 소망도 적어본다.

전원우를 처음 만난 게 언제더라. 스쳐지나간 다른 얘기들보다 꼬리를 쫓기가 힘들다. 정말 언제더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둘 다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타입은 아닌데. 나는 경계심이 많고, 전원우는 남에게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전원우가 차가운 사람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실은 되게 다정하다. 콧잔등이며 이마며 심지어는 미간에까지 입 맞춰주곤 한다.

 

아닌 척 해도 외로움을 많이 타기도. 슬플 때면 내 뒷목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참는다. 그 가녀린 떨림이 전해지면 나는 정말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된다. 몸을 들썩이며 어깨를 쓰다듬고 싶지만 전원우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그냥 가만히 있어 달라 한다. 몇 번 그 시간을 견디면 알 수 있다. 결국은 위로가 된다는 거다. 나는 전원우에게, 전원우는 내게.

 

 

 

 

거리에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단단한 몸과 부딪혔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쳤다.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반질거리는 운동화가 배를 걷어차자 그제야 생각이 났다. 전원우를 처음 만난 날이.

 

 

 

 

내게는 누이가 있었다. 작고 작아 어느 순간 푹 사라져버릴 것 같은 모습. 계속해서 내 곁을 떠나가던 다른 가족들처럼 어둠에 삼켜질 줄 알았다. 하지만 누나는 하나 남은 나를 지키겠다 그 마른 다리를 놀리고 다녔다. 몸이 약했던 내가 소리 없이 목숨을 삭이는 동안 누나는 소음 속에서 뼈를 녹였다. 누나의 삭은 뼈를 먹고 자란 나는 누나를 따라다니곤 했다. 누나는 밖에서 지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는 이름이 없었다. 누나가 죽고 나서는 내가 그 이름을 이어받았다. 불러주는 이는 전원우 뿐이지만.

전원우를 처음 만난 건 누나가 죽은 날이었다. 안 그래도 허약해진 몸에 쓰레기를 쑤셔 넣은 탓이었다. 어쩌면 필연적인 죽음.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몸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곤 조그맣게 숨을 쉬었다. 내 숨을 나눠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살. 그 살 위에 뿌려지는 옅은 소금. 조금 있으니 눈물보다 한기가 나를 덮쳤다.

한참을 넋을 잃고 돌아다녔다. 거리의 휘황찬란한 빛도 암흑이었다. 바람이 불어 모래가 눈에 들어와 나는 한참 눈물을 흘렸다. 눈물에 씻겨 모래알이 흘러내려갔는데도 왠지 멈추질 못했다. 그렇게 희뿌연 시야로 비틀대다 오늘처럼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마 누나를 아는 사람인 듯 했다.

 

"재수 없는 것들!"

 

낮게 중얼거리며 내 뒷목을 잡아 벽으로 던졌다. 무슨 화가 그렇게 많은지, 널브러진 몸을 몇 번 강하게 밟기도 했다. 남자가 등을 돌리고 나는 곧장 일어났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커다란 등에 뛰어들어 허리에 매달렸다. 쓰러트리진 못했지만 멍청하게 팔을 휘적이게 만들었다. 흔들리는 몸과 달리 단단하게 허리를 쥔 내 마른 팔을 뿌리치는 남자의 손이 아까보다 거칠었다. 그 때구나, 내 오른쪽 발목이 부서진 게. 뼈가 어설프게 붙어버렸는지 아직도 절름발이 신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욱씬거리는 다리를 느끼며 다시 뛰어들 준비 중이었다. 남자가 다시 다가와 그 커다란 발로 나를 짓이기기 전에 몸을 세웠다. 몸을 낮게 숙이고 눈을 바로 떴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눈앞으로 전원우가 들어왔다. 이미 날아가 버린 내 손이 전원우의 목 언저리를 스쳤다. 날카로운 손톱에 긁혔는지 작게 피가 맺혔다. 흉터가 남았으려나. 원우는 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살짝 들어 올리곤 뒤의 남자가 말을 걸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오자 아예 다리를 넓게 움직여 달리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새까만 앞머리. 흐릿하게 지나가는 거리의 조명들은 암흑에서 빠져나와 전원우의 맑은 잿빛의 날개 속으로 몸을 감췄다. 무심한 얼굴로 바람을 스치는 원우를 보면서 나는 만약 회색 천사가 있다면 분명 전원우일 거라고, 적어도 저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잠깐 사이 온 몸이 꼬질꼬질해졌다. 적당히 정리해도 흐트러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동이 틀 즈음 돌아갔다. 내 꼴을 보고 전원우는 아닌 척 하며 퍽 속상해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네 쓰다듬 하나면 돼. 얼굴을 비비자 또 조용히 웃으며 푹 젖은 머릴 쓰다듬어준다. 걷어차인 배가 아리지만 나도 마주 웃어보였다. 아까부터 내리던 빗방울이 더 세차졌다. 나를 내보낸 전원우가 비닐우산을 챙겨 나왔다. 발이 젖을 것 같아 발끝을 한껏 세웠다. 흐릿한 하늘에 해가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한 우산을 쓰고 걷느라 원우의 걸음이 더 느려졌다. 평소보다 시간이 배는 걸렸다.

원래대로라면 편의점 알바가 끝난 뒤 집에 들렀다 곧장 공사장으로 간다. 저 마른 몸으로 집채만 한 철골들과 씨름하는 일이다. 그 곳에도 몰래 따라가 봤지만 별로 기분 좋은 곳은 아니었다. 종종 원우와 일을 하는 아저씨들이 먹을 걸 주긴 하지만, 보통은 위험하다며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그래도 오늘은 비가 오니까. 얼마 뒤면 또 배를 곯겠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다. 기분 좋은 빗소리다.

 

"지수야, 나는 고래가 되고 싶어. 이왕이면 하늘도 날아다니는 커다랗고 새파란 고래."

 

이불을 피고 누운 원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고래가 뭔지도 모르면서 얼굴을 비비며 수긍을 했다. 잘 어울려. 너랑 딱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전원우를 상상해봤다.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 그 풍경을 올려다보는 나를 안아 함께 구름 사이를 누비는 원우. 부르르 몸이 떨린다. 꼭 그렇게 될 거야. 까칠하게 목을 비집고 나오는 소리. 원우가 피식 웃었다.

 

"대답하는 거야?"

 

당연하지. 엄청 잘 어울려, 정말이야. 아까부터 졸았지만 조금 서늘한 체온이 몰려오자 몸이 나른해진다. 팔에 볼을 비비다 하품을 했다. 익숙하게 코끝에 입맞춤. 머리를 쓰다듬다 다시 이마에 한 번 더. 좀 더 품속으로 더 파고든다. 으르렁대기 시작하는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와르릉. 우레 같은 오토바이 소리에 잠이 깨지만 조금 전까지 꾸던 꿈이 머릿속을 떠돈다. 언뜻 번쩍이는 전원우의 얼굴. 그 위로 환하게 일렁이는 웃음. 전원우의 웃음.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깰 기미도 없이 깊게 잠든 얼굴이 평소보다 말라 보인다. 문득 든 생각에 목덜미를 살폈다. 있다. 흉터가. 피부보다 뿌연 색으로 돋아난 새 살이 맨들거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기지개를 키고 창틀에 올라갔다. 살짝 열려있는 틈으로 물이 샌 게 보였다. 젖지 않게 조심하면서 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하늘은 캄캄하다.

그 노력이 무심하게 나는 금세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됐다. 찝찝하다. 비가 오면 공기는 한 없이 깨끗해진다. 그에 반해 땅의 물은 그저 구정물. 조용히 뒤척이며 혓바닥을 날름댄다. 그래도 반편이 발로 열심히 뛴다. 목 언저리에서 나비가 파닥이는 기분. 차가운 공기가 빠르게 폐를 쓸고 지나간다.

 

"이 재수 없는 고양이 새끼! 도둑질까지 해?"

 

뒤통수에는 커다란 고함. 나를 뒤쫓는 무겁게 철벅이는 뜀박질. 몸이 오싹오싹하다. 꿈에서 본 얼굴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달랑거리는 파란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계속 달린다. 질퍽하고 어두운 거리를 달린다. 비릿한 물 냄새가 풍겨도 계속 달리고, 달리고, 그리고 퍽.

더러운 흙탕물이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싼다. 물에 젖는 건 싫은데. 어쩐지 편안하다. 차갑던 물이 따스해진다. 나는 자꾸만 졸려 온다. 원우의 품 같기도 하다. 하루 종일 잠만 자냐며 장난 섞인 타박을 하던 낮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미안, 졸음에 못 이겨 나는 마지막으로 원우를 부르고 잠이 든다.

물에 젖어 얼룩진 세단이 지나가고 고인 물이 붉게 물든다. 시끄럽게 달리는 차들이 드리운 차가운 베일 밑에는 산산이 부서진 파란 조각, 그리고 역시 비틀려버린 하얀 목숨이 빛을 잃고 가라앉아 있다. 깊은 항해를 멈춘 고래는 거친 아스팔트에 정박해 있다. 거리는 밤이 되면 또 같은 빛을 뱉어낼 것이다. 사람들은 악취를 풍기며 여전히 미로 같은 길을 걷는다. 그 거리의 세 번째 골목, 세 번째 골목 앞의 횡단보도도 없는 작은 도로에 고래를 사랑한 마른 고양이가 꿈도 없는 잠에 든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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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우
+최승철 김민규 최한솔
전진 그룹 둘째 아들로 전진 그룹은 뒷세계에서 시작해 합법적인 곳까지 자리잡은 조선업 중심의 대기업임. 시작이 그랬던만큼 아직까지도 뒤가 구리기로 유명함. 원우는 둘째라 크게 회사일에 관여하진 않지만 어느정도 관리 지분이 있긴 함. 그럼에도 웬만하면 밖으로 잘 드러나거나 하지 않는 이유는 나이차 많이 나는 맏형한테 워낙 견제를 받고 있기 때문임. 순영이네 권호그룹이랑 사이가 안 좋음. 순영이네도 뒷세계의 큰 손이어서 어쩔 수 없이 겹치고 부딪히는 부분이 있기 때문. 보통은 순영이가 먼저 신경 긁는데 원우는 별로 관심 없음. 애초에 권호그룹을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고.

승철 한솔은 전진 그룹 음 이사 쯤 되는 암튼 고위 간부 아들들.  어렸을 때부터 어지간히 붙어다녀서 되게 친함. 김민규는 대학 친구. 원우가 그렇게 대단한 집안인지도 모름. 그래서 승철 한솔까지 사자대면하면 되게 웃김. 승철이가 아무 생각없이 회사얘기 꺼낼라하면 원우가 정강이까고 아파하는 승철이를 한솔이가 비웃는 상황이 반복됨.

 

권순영
+문준휘 서명호 이찬
권호그룹 막내 아들로 대외적 망나니를 맡고 있음. 권호그룹은 뒷세계, 특히 중국 삼합회와 손을 잡아 키운 회사임. 원우네 만큼 구린게 많아서 순영이의 망나니짓은 일부러 시선몰이를 위해 하는 부분이 없잖아 있음. 막내라 회사일과는 거리가 멈. 거의 배제시키는 수준이라 순영이 춤 배우고 그럼. 그래도 어느정도 회사 얼굴마담, 마스코트 격이라 기업간에 모이는 자리 있으면 얼굴은 매번 비침. 또 그런 파티에 나가줘야 스캔들도 일으키고, 겸사겸사. 전진 그룹이랑 사이 안 좋은데 원우랑 얼굴 튼 몇 안되는 사람이라 원우 만나면 맨날 신경 긁음. 순영이한텐 그냥 유흥.

준휘 명호는 중국 쪽 이사들 아들. 어느정도 사무적인 관계로 시작했지만 순영이 사교성으로 다 친구 되버림. 원우네 승철한솔과 비슷한 관계. 찬이는 사생아. 그니까 이복동생. 잘 알려져있지 않고, 알더라도 먼 사이일 거라 예상하지만 사실은 원우네 친형제보다 가까운 관계. 사실 순영이는 성격이 몹시 괜찮음. 몹시몹시. 이목끌라고 망나니짓 하는거.

 

홍지수
+윤정한 이지훈 이석민 부승관
지수네 홍청 그룹 역시 뒤에서 시작했지만 지수가 크기 전 뒷세계 말끔히 정리하고 깨끗하게 사업하는 몇안되는 회사. 요식업 전문이면 좋겠음. 암튼 지수는 셋째 아들, 위로 형하나 누나하나 있고 동생하나 있는데 형 누나가 동생들은 사업에 일절 관여 안시키고 지켜줌. 그래서 지수는 평범하게 대학다님. 전공은 그냥 뭐 문창과 아님 무용같은 거도 좋음. 그래서 지수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무슨 사교계 파티같은거 있어도 잘 참가 안하고 (하도 뒷거래가 구리고 많아서 형누나가 철벽치고 못가게함) 얼굴도 안알려져 있음.

윤정한 이지훈은 어찌보면 피고용인인데 지수 성격이 구김살 없어서 되게 가깝게 지냄. 정한이는 전담 비서 같은 건데도 거의 보모급이고 지훈이는 지수네 형 직속 부하직원. 지수가 좋아해서 일하는데 맨날 불러싸서 지수네 형이 그냥 너 지수 놀아주고 남는 시간에 일해라 함. 석민 승관은 대학 후배들. 어쩌다보니 지수 재벌 2센거 알게되고 ㅇ0ㅇ이러는데 사실 별 차이 없이 그냥 같이 다님. 그래서 지수가 좋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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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이네 가게는 치안이 구린 매춘거리에 위치함. 보통 그 거리에서 장사를 잘 해내가는 꼴을 보기 힘든데 워낙 무던한 성격에 험한 꼴을 꽤 많이 봐와서 포주의 손아귀에 머리채가 잡혀 끌려오는 창녀를 봐도 그러려니하며 가게를 잘 꾸려감. 그런 지훈이의 주 업무는 창녀들의 몸에 조직 소유라는 문신을 새기는 거. 조직별로 문양도 다르고 위치도 달라서 지훈은 일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외우게 된게 그거였음. 조직별 문양과 포주들 얼굴. 의외로 무뚝뚝하고 상남자스러운 성격에 지훈은 그 동네 깡패들하고도 꽤 잘 지냄.
그러던 어느날 지훈이 제일 싫어하는 포주가 마른 몸의 남자 하나를 질질 끌고 옴. 남자의 헐렁한 티셔츠 안은 맞은 듯 얼룩덜룩했음. 머리채를 던지듯이 놓은 포주는 담배를 남자의 어깨의 지져 끄며 말함.

 

"이 새끼 등에, 한 달이면 돼?"

 

널부러진 남자의 등을 들춰본 지훈은 포주가 던진 담배꽁초를 지그시 밟음.

 

"한 달이면 좀 빠듯한데요."
"딴 애들 다 킵하고 얘 먼저 해줘. 돈은 더 줄게."

 

왠일로 부탁조래. 지훈은 놀란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꺼내 뭄. 작업을 할 때면 언제나 검은 연기를 뿜는 지훈을 아는 포주는 부탁한다며 지훈의 테이블에 봉투를 내려놓음. 선불인가. 지훈의 어깨를 두드린 포주가 죽은 듯 미동도 없는 남자를 지나침. 그 때 꿈틀거리며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은 몸 만큼이나 커다란 멍들이 작은 얼굴의 반절을 가리고 있었음. 부어오른 왼눈은 시뻘건 피가 말라붙은 게 꽤나 크리피한 모습임. 남자는 겨우 고개를 들더니 포주의 뒷모습에 침을 뱉음. 그리곤 터져서 울긋불긋한 입술로 갈라진 목소리를 냄.

 

"뒈져버려... 씨발..."

 

포주가 뒤를 돌아 머리통을 걷어차기 전에 남자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기절해버림.

 

 

지훈은 널부러진 지수를 그냥 시술대로 올려놓음. 별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 상처 치료해줄 정도로 상냥한 성격도 아니고, 작업 준비나 해야겠다 싶음. 그렇게 지수를 없는 취급하며 테이블에 앉아있었음.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지훈의 뒤에서 잔뜩 망가진 목소리가 새어나옴.

 

"담배, 있어요?"

 

잔뜩 꺽꺽대는 소리가 거슬려 짧게 인상을 쓴 지훈이 자켓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피는 남자에게 던지고 한 개피는 자기가 뭄. 남자는 지훈이 엎어놓은 그대로 삐걱이는 팔을 겨우 휘저어 떨어진 돛대를 집음. 엎드린 몸으로 고개만 쭉 빼놓은 자세는 불편할 만도 했는데 뒤척일 마음도 없는지 그대로 담배를 물고 잘근잘근 씹으며 다시 입을 염.

 

"불이 없잖아."

 

뭐 이런게 다 있어. 갑자기 튀어나오는 반말에 지훈은 어이가 없었지만 불 정도는 붙여줄 수 있었음. 불이 붙자 남자는 익숙하게 깊게 빨아들이곤 회색 연기를 뱉으며 고개를 푹 뭉갬.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의 짓이겨진 필터부분에 피가 묻어났음. 문득 든 생각에 지훈이 일어남. 흐리멍텅한 눈이 그런 지훈을 쫓음. 지훈은 자욱한 담배연기를 뚫고 남자에게 다가와 말 없이 더러워진 박스 티셔츠를 들어올림. 예상대로 너덜너덜, 성한 부분이 없었음. 구석으로 가 너저분한 약통을 들고온 지훈이 시술대 옆에 의자를 끌고 앉아 깨끗했을 등을 치료함.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손을 움직이느라 등에 담뱃재가 떨어져도 남자의 등은 잠깐 떨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도 없음. 멍 든 등에다 문신을 새길 순 없어 그렇게 조용한 일주일이 지나감.

 

살짝 웃을 때의 인상과 웃음기 없는 얼굴의 차이가 큰 사람이었음. 좁은 가게 안으로 들어온 순영에 대한 지훈의 생각은 딱 그정도였음. 어느정도 상처가 치료되어 구석부터 작업이 시작된 지수의 등을 순영은 조용히 매만짐. 지수는 움찔거리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역시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음. 그렇게 지수를 더듬던 순영이 지훈에게 말을 검.

 

"예쁘지?"

문신으로 새길 꽃을 얘기하는 가 싶어 지훈은 고개를 끄덕임. 그러곤 너무 예의없나 싶어 말을 덧붙임.

 

"아주 화려하던데요."
"아니, 얘 말이야."

 

순영이 시술대 옆 의자에 앉아 엎드린 지수의 머리채를 잡아 돌림. 억센 손놀림으로 눈을 마주치게 해 놓고 볼을 쓰다듬는 손은 아주 세심함.

 

"귀엽다니까. 반항만 안하면 좋겠는데".

 

찌푸린 얼굴을 살피던 순영이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은 뺨을 톡톡 침.

 

"도망가지 않게 잘 봐둬."

 

자리에서 일어나 상처투성이의 마른 다리를 쓸음. 입맛을 다시는가 싶더니 차가운 얼굴로 다리를 움켜쥠.

 

"이번에는 이 예쁜 다리가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지수를 향한 경고인지. 지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게를 나서는 순영의 뒷모습을 바라봄. 고개를 묻은 지수의 등이 살짝씩 흔들리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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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말이 있었다.

우리의 닿음이 깊어질 때면 내 어깨를 붙들고 내뱉던 전원우의 실낱같은 희망. 어깨를 쥔 손은 언제나 눅눅하게 젖어있었고, 까만 눈동자에는 절박함이 가득했다. 나는 그 무거운 매달림을 견디지 못해 늘 마지못해 수긍했고, 전원우는 그제서야 모든 걸 이어나갔다. 전원우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비겁한 회피이고, 의미없는 자기위로라는 걸. 그럼에도 그런 한심함의 무게를 빌려야 할 만큼 어리다는 이야기다. 그래, 우린 어리고, 전원우는 멍청하기까지 했다.







매미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해를 거르지 않고 돌아왔다. 시원한 책상에 볼을 대고 교실을 쓸고나가는 한 무리의 호르몬 덩어리들을 바라봤다. 속으로는 별 병신같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를테면 저 지나가는 튼실한 허벅지들이나 팔뚝, 땀이 흐르는 목선…. 고이는 침에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교실에는 나와 윤정한, 그리고 몇몇 청소당번들만이 남아있었다. 매미들은 여전히 우렁차다. 쓸데없이 성실해, 섹스하고 죽을 것들이. 궁시렁대며 가방을 챙겨든 윤정한이 내 책상 앞에 멈춰섰다. 아, 나도 섹스하다 죽고싶다.



"안 가?"

"가야지."

"진짜 맨날 늦으면 앞으로 혼자 간다?"

"어차피 이제 방학인데."

"보충있잖아."

"아... 너무 싫어…"

"빨리 가방이나 싸."



재촉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윤정한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하니 발로 책상을 툭툭 찼다. 머리가 흔들흔들, 아, 윤정한 잘 생겼다. 정신이 멍해 허허실실 웃음만 비집고 나온다. 결국 평소처럼 윤정한은 내 가방을 챙겼다. 홍지수!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뒷문에서 최승철이 나를 불렀다. 허벅지가 괜찮은 최승철. 절로 침이 고인다. 점심시간마다 꼬박꼬박 운동장을 찾는 것은 거의 최승철 때문이다. 빗자루를 든 손을 타고 의식의 흐름대로 핏줄을 감상했다. 좋네...



"누가 너 찾는데?"

"누가, 얘 친구 나밖에 없는거 알잖아."

"아닌데. 친구 많은데."

"2학년, 전원우."

"아, 또 전원우야?"



헉, 나 정말 친구 윤정한 밖에 없나보다. 전원우는 친구가 아니니까. 심각하네. 투덜대는 윤정한에게서 가방을 건네들었다. 뒷문을 나와 에어컨 바람에서 벗어났다. 와 씨, 진짜 더워! 나오자마자 땀이 솟아날 것 같아 단추를 끄르며 멀뚱히 서있는 전원우에게 다가갔다. 이 더운 날씨에 목 끝까지 단추를 꼭꼭 잠구고도 땀 한방울 없이 정갈하다. 역시 전원우, 미래의 목사님! 동그란 안경 너머 긴 눈과 마주치자 윤정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얘는 왜 이렇게 전원우를 싫어할까. 자기랑 반대라서? 활짝 벌어젖혀진 윤정한의 교복이 주인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왜 이렇게 늦어."

"음, 더워서."

"같이 갈 수 있어?"

"정한아, 어…"

"뭘 또 물어. 안된다 해도 같이 갈거면서. 더우니까 빨리 가."



망설이는 내 등을 미는 손이 신경질적이다. 윤정한이 전원우를 싫어한게 먼저일까, 내가 전원우를 우리 하교길에 끼워넣은게 먼저일까. 전자였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 윤정한이 전원우를 싫어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학교를 벗어나면 뜨거운 길바닥이 발을 데운다. 금세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윤정한은 슈퍼에서 멈춰 사과맛 쭈쭈바와, 설레임 하나를 샀다. 밖으로 나오다가 짜증을 내며 설레임 하나를 더 계산하곤 익숙하게 내게는 쭈쭈바, 전원우에게는 설레임을 넘겼다.


츤데레.


내 한마디에 헛웃음을 뱉고 파란 뚜껑을 따 길거리에 버리자 쏜살같이 주워 휴지통에 넣은 전원우를 노려보는 것이 종종 찾아오는 셋의 하교길. 곧 찾아오는 갈림길에서 윤정한과 헤어지고, 전원우는 별 말 없이 내 뒤를 쫓아온다. 땀냄새가 날 것 같아 거리를 둬도 긴다리로 휘적휘적 따라 붙는다. 편안한 침묵. 발소리가 커다랗다.

둘이라고 별로 다를 건 없다. 어제와 똑같이 들어오자마자 에어컨을 틀고, 옷을 갈아입고, 짧은 샤워를 마친다. 전원우도 자연스럽게 옷을 꺼내 입었다. 달라진 건 아이스티 잔의 갯수와 컴퓨터를 키는 대신 꺼낸 플스 뿐이다. 냉기가 돌지 않아 그 새 또 등에서 땀이 샜다. 아이스티에 얼음을 둥둥 띄워 전원우의 옆에 앉았다.



"아, 진짜 더워. 너 더위 안타는 거 진짜 복받은 줄 알아."

"그 대신 추위를 많이 타잖아. 그거대로 괴로워."

"난 추위도 많이타는데."

"더위가 낫지. 더우면 벗으면 되잖아."

"지금 나 벗으라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뜨며 티셔츠를 팔락거리자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 귀여워. 발개진 귓바퀴가 눈에 들어오자 침대 위를 방방 뛰고 싶어졌다.
시덥잖은 말을 주고받으며 게임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새 창밖에서 붉은 빛이 들어왔다. 요란하게도 지는 해를 보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게임화면이 꺼져있다. 컨트롤러가 쥐어진 내 손이 황망하게 비워지고 입 안을 굴러다니던 얼음도 다 녹아 사라졌다. 아주 일상적이게,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나는 눈을 감고, 전원우의 차가운 손이 볼을 감싼다. 동그란 안경은 벗은지 오래다. 코 끝이 닿을 듯 말 듯 망설이다 포개지는 입술은 조금 낭만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어번 뻐끔거리고 떨어졌다, 다시 조금 더 강하게 부딪혀오는 입술에 방은 금세 질척한 소리로 가득찼다. 어정쩡하게 이 위에 걸쳐있는 전원우의 혀를 내 입 속으로 이끌어 얽고, 단단한 이를 훑는다. 점점 내 몸을 누르 듯이 다가오는 마른 몸에 바닥에 팔 뒤꿈치가 닿았다. 지금까지 만난 애들은 전부 키스 중에 날 찍어누르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마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겠지. 가끔 다정하게 뒷머리를 받쳐주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전원우 또래 애새끼들은 대부분이 그랬다. 그 중에서도 전원우는 독보적이다. 정도도 그렇지만. 그렇게 나를 밀어대며 침대로 안착시키고 바지를 벗기는 놈들과는 달리 이 멍청이는 그 다음이라는 걸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갑자기 혀의 끈적한 움직임이 멈췄다. 전원우의 브레이크가 또 발동했다. 반 쯤 누운 채로 몸을 일으키는 전원우를 바라봤다. 최대한 짜증이 담긴 눈으로. 그래봤자 신경도 안쓰겠지만 말이다. 반들반들한 입술을 닦아낸 전원우가 고개를 들었다.



"나, 호모포비아야."



그래, 이거. 다른 놈이 키스하다 말고 갑자기 포비아 선언을 한다면 난 아무도 모르는 내 지랄스러움을 모두 모아서 따다 줄 수 있을텐데. 안타깝게도 난 전원우의 말에 늘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전원우가 저 말을 할 때면​ 날카롭게 째진 눈이 길잃은 강아지처럼 촉 처지는데, 나는 그게 못 견디게 안쓰럽기 때문이다. 그래, 이건 전원우 잘못이 아니다. 다 독실한 종교인이시자 대단한 세뇌교육자이신 쟤의 부모님 잘못이지.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뱉고 다시 전원우의 뒷목을 잡았다.





"나도 알아."

"정말로..."

"알았으니까 하던 거 계속할래?"



어린 눈. 흔들리는 갈색 동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여느 때와 같이 나의 박력있는 입술 박치기로 2라운드가 시작된다.




오늘도 놀이터 앞까지. 전원우의 까만 뒤통수를 바라보다 발을 멈췄다. 계속 걸어가던 전원우가 그제야 허전함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으로 들어간 전원우를 보고 있자니 조금 슬퍼졌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무인도에 홀로 서 있는 듯 했다. 수많은 평범함 속에 이상하게 돋아있다. 눈치 없기로 유명한 전원우가 내 서글퍼진 기분은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먼저 다가오는 법이 없는 자칭 호모포비아를 향해 걸었다. 다행인 건 전원우는 나를 밀쳐내는 법이 없다는 거였다.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단정한 얼굴에 심장이 울렸다. 새까맣게 변한 여름밤이 노란 불빛에 갈라지는 게 느껴질 때 쯤 입술이 떨어진다. 곧바로 뒤를 돌아 갈 줄 알았던 전원우가 손을 잡아왔다. 진중한 눈을 마주하니 괜한 감정이 고개를 비집고 나온다. 혹시, 혹시... 볼이 달지 않도록 입술을 꾹 물었다.



"형."


무거운 목소리에 손 끝이 차갑게 굳는다. 세게 짓누른 입술을 살짝 핥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머리가 어질했다.


"우리 이거 그만하자."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전원우의 그 말을 들을 때면 늘 어딘가 아파오곤 했다. 나, 호모포비아야. 전원우와 처음 키스한 날, 전원우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그대로 돌려보낸 뒤 베개에 머리를 박고 울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외로웠다. 자기 세상에서 나를 똑 떼어버리는 말이었다. 게이 홍지수는 전원우의 감은 눈 앞에서 손을 휘저어 봤자 메마른 무인도를 빠져나랄 수 없었다. 어설픈 회피는 어설픈 상처를 남겼다. 어설픈 상처를 어설프게 동여매고 다시 입술을 뻐끔댈 수 밖에 없었다.





복잡하고 거지같은 인생에서 단언할 수 있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원우는 절대 포비아가 아니라는 것, 하나는 방학 중 보충은 인생을 더욱 거지같이 만든 다는 것. 묵직해진 머리를 이고 공격적으로 내 가방을 싸는 윤정한을 바라봤다. 이미 교실은 텅 비어 오후의 뜨거운 햇살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꼬질꼬질한 커튼이 나부대는게 느껴졌다. 고개를 내리자 윤정한의 까만 티셔츠가 보이고 어제 어둠 속 가로등 아래서의 키스가 생각났다. 우리 이거 그만하자.
누구 마음대로.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 결국 그 날은 전원우의 손을 뿌리치고 달렸다. 간간히 오던 연락도 씹었다. 웃기게도 상처를 받은 거였다. 시작하지도 않은 관계에 혼자 이입해서는. 책상 바닥에 이마를 부볐다.


"너 진짜 이제 나 만만해서 이러지?"

"정한아."

"왜."

"키스할래?"

"또 무슨 일인데."

"몰라. 정한아, 키스해줘."

"어휴, 너 이럴 때 진짜 귀찮은 거 알지?"

"얼른, 빨리..."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감았다. 윤정한의 손이 의자를 쥐는게 느껴지고, 책상에 단단하게 받쳐진 팔을 쥐었다. 느릿하게 부벼지는 입술 사이로 혀가 들어왔다. 서둘러 마주 혀를 놀리자 달래듯 움직이는 게 부드러웠다. 숨이 모자라지 않게 천천히 입술을 뗐다 붙였다를 반복했다. 과분할 정도로 상냥한 움직임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위로받고 싶을 때면 늘 이렇게 윤정한을 졸랐다. 이런 사랑스러움은 전원우와의 치열한 입맞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팔을 들어 윤정한의 어깨에 올리자 땀이 살짝 밴 손이 내 뒷목을 감쌌다. 윤정한이 교실 밖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답지않게 쫄았나. 보채 듯 윤정한의 소매를 당겼다. 나는 사랑받고 있다.




갈림길에서 윤정한과 헤어지고, 혼자 집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오묘했다. 울적하면서 산뜻한 기분, 괜히 굴러다니는 깡통을 걷어찼다. 그렇게 노란 깡통만 바라보면서 집 앞에 도착해 고개를 들자 의외의 가슴팍이 나를 반겼다.


"으아, 전원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원우가 고개를 숙였고, 금세 입술이 마주 닿았다. 입술은 평소같이 부드러웠지만 평소보다 훨씬 까슬한 키스였다. 거칠게 혀가 밀려들어와 답지않게 서툰 마중을 나갔다. 자연스럽게 받아주긴 하지만 머릿속은 과부하였다. 그만하자더니?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계속 밀고 들어오는 입맞춤에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널찍한 어깨를 쥐고 밀어내려 했지만 오히려 허리를 받치고 더 가깝게 다가왔다. 입술이 떨어지자 몰아쉬는 숨소리만 맴돌았다.





허겁지겁 도어락을 해제하고 들어오는 중에도 전원우의 손은 내 허리를 더듬었다. 끈적거리는 피부가 불쾌하지도 않은지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물고 핥아 문을 여는 손이 벌벌 떨렸다.


"좀, 원우야. 나 좀 씻기라도 하면,"

"안 돼."


단호한 대답에 입이 닫혔다. 하복 셔츠 단추를 풀어내려가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어려웠다. 밀어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 무의미한 저항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딱 붙은 채로 현관을 넘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다급하게 리모콘을 쥐어 에어컨을 키자 전원우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하자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이런 간질거리는 스킨쉽을 전원우에게 기대해 본 적도 없는데. 괜히 눈가가 뜨끈해졌다.





에어컨을 키길 잘했지. 맨 몸으로 편안히 잠든 전원우를 바라보며 뿌듯함을 만끽했다. 찝찝해진 몸을 씻고 거실로 나와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영화를 봤다. 정신없는 오락영화였다. 주인공이 지나갈 때마다 요란하게 터지는 효과음에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사실 그걸 바라고 튼 영화인 것도 사실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는지 눈을 뜨자 사방이 어두웠다.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 통이 사라지고 에어컨에서는 아까보다 선선한 바람이 돌았다. 급하게 들어간 방에는 텅 빈 침대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복잡했던 마음이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눈물이 나오기엔 준비를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전원우가 누워있던 곳에 코를 박고 질질 이불을 적셨다. 내일 부은 눈을 보고 윤정한이 뭐라고 할까. 엄청 놀려대겠지. 서러움이 배가 되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어둠속에서 찌질한 눈물을 떨구는데 낯선 초인종이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택밴가. 코를 훌쩍이며 문을 열었다. 요즘은 계속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 같다. 이게 다 전원우 때문이야. 눈가가 시큰했다.

 
배를 건네받으려 내민 손이 계속 휑했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자, 또 뜻밖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얼굴이었다. 왼쪽 눈이 보랏빛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너, 눈. 눈 왜 그래!"

"나 쫓겨났어. 재워줄 수 있지?"

"왜 쫓겨났어. 어쩌다가."

"나 호몬가 봐."

"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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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키가 크다. 우리 집 담벼락 너머로 잘생긴 얼굴부터 가슴 팍까지 죄 보인다. 건듯 나뭇가지에 이마를 얻어맞기도 했다. 향내로 가득한 봄날에 그렇게 이마를 맞으면, 붉은 빛이 도는 하얀 꽃을 머리칼에 얹고 우스운 얼굴이었다. 내가 보고 있다는 건 영영 모를 듯 주변을 훅훅 돌아보고 짓는 민망한 웃음조차도 정갈했다. 가무잡잡한 얼굴이 둥실둥실 떠다닐 때면 그 애의 이마를 동쳤던 가장이를 만지작 거린다. 그리곤 아직도 가림자 위에 있는 해를 다그친다. 얼른 내려가서 쉬어라, 그래야 나두 그 애를 보지 않겠니. 해는 덩그러니 말이 없다.



반짝이던 안녕



칼칼한 목은 몇 년째 달고 있어도 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좁은 목구멍 사이에 거칠한 사포를 달고 하는 기침은 종국에는 빨간 꽃잎을 떨어트린다. 아직도 찬바람이 부는 것이었다. 귀 밝은 봉주 아주머니가 오기 전에 기침을 감추며 방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움트는 봄을 포기할 순 없어 대청마루를 향해 머리를 이고 문지방에 손을 포갠다. 까칠한 손등에 턱을 괴자 봄냄새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 좋다. 채 가시지 않은 겨울사이에 야트막하게 내려앉은 단내에 불편한 문턱 자리를 벼긴다.


코를 간질이는 보드란 느낌에 눈을 뜬다. 해가 저 서산에 동그랗게 걸쳤다. 그 애가 올 시간이다. 자세히 보니 뿌연 매지구름도 엉덩이를 살짝 내밀었다. 비가오려나. 촉촉하게 젖을 마당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잘 깨웠다, 요놈. 콧잔등에 손을 올린건 오래 보이지 않던 괴였다. 새하얀 털에 꺼멓구 포슬한 얼룩이 있다. 고새 얼마나 잘 챙겨먹은 건지 소담스레 살이 올랐다. 얘, 어느 집 인심이 그렇게 좋았니. 뒷목을 긁어주자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얼굴을 비벼온다. 한참을 그렇게 겨르로이 복작댄다. 퐁퐁 말간 털을 뿜어 코가 간질간질하다. 재채기가 나온다. 엣취! 작은 재채기에도 왕왕 울리는 골에 몸이 축 처진다. 힘이 빠진 고개를 들자 그 애가 있었다. 심지어 이 쪽을 보고 있다. 가직하게 마주친 눈에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콧물이 나지 않은 걸 위로 삼아야 할까. 재빨리 방에서 삐죽 나온 얼굴을 들였다. 온 몸이 홧홧 달아올라 목 뒤까지 뜨끈하다. 아직도 있을까. 눈을 내밀었다. 꽃순이 돋는 매화나무만 인사를 건넨다. 하나도 안 반갑다. 괜시리 마음이 갈랬다.


***


담벼락 위로 나타난 따수운 갈색 머리에 어제 일은 기억도 나지 않는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느 새 담벼락 중간 매화나무까지 닿았다. 다 좋은데 걸음이 너무 빠르다. 조 괴처럼 느릿하게 굴면 얼마나 좋을까. 담벼락 위에 느지막히 누워 하품하는 털뭉치는 세상만사에 관심을 긋고 살아가는 것 같다. 이렇게 잠깐 비추는 그 애의 콧대를 보려 끙끙대는 모습과는 다르게 말이다. 빗방울이 토독토독 떨어진다. 어제 보았던 매지구름이 드디어 망와에 닿은 모양이다. 하필 지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 애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차분한 머리가 촉촉히 젖어간다. 달음박질을 친다. 휭하고 사라져버린 모습에 아쉬워 고개를 쭉 빼어보자 거세진 비에 툇마루까지 물이 튀었다. 에구, 쫄딱 젖겠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 얼굴을 고대로 빼놓구 있는데 그 애가 다시 달려온다. 비를 피할 곳을 찾으려 두리번대다가 담벼락을 넘어간 우리 집 매화나무가지 아래 쭈그려앉는다. 그래봤자 깨벗은 나무인데. 몸을 일으켜 신을 신었다. 철벅이는 물마를 밟으며 느루 걸어 다가간다. 쉴새없이 떨리는 마음에 찬 비가 끼얹어져 몸이 발발거린다. 뒷꿈치를 들고 아래를 내려다 보자 단정스런 정수리가 축축히 젖었다. 떨어지지 않는 입에 눈동자만 도닌다. 까슬한 입술이 달막거리기를 몇번, 겨우 입을 열자 흉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목을 디밀고 나왔다.

"들어와 있다가 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알이 가년스러워 보일 것이 뻔하다. 돌아본 그 애의 얼굴에 바오 자리잡은 이목구비가 또렷해 눈치도 없는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비에 젖어 드러난 어깨가 든든하다. 멍하니 대답을 기다리는데 콧잔등으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눈 앞에 튕긴 물조각에 눈을 감았다 뜨자 저 아래 있던 잘생긴 얼굴이 두 뼘은 위에 있다. 작은 쪽문을 열자 환히 웃는다.


툇마루에 뻔뻔스레 자리를 잡은 괴를 쓰담는 손이 퍽 커다랗다. 비가 데려온 찬바람에도 고집스레 그 애 옆에 쭈그려 앉았다. 이렇게 젖은 몸으로 있다가는 내일즈음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거다. 그래도 이리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이 마주치자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너무 빤히 바라본 덧 같아 미안해진다. 가져다 준 수건으로 머리를 한 번 털더니 목을 한 번 큼큼 가다듬는다.

"비 피하게 해줘서 고마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에 소년의 향이 묻어있다. 사실 그 목소리에 취해 내용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달싹거리며 황홀한 소리를 내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느라 대답이 없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본 적 없다는 듯이 건공중을 응시하는 꼴이 스스로도 웃겨 실소가 나왔다.

"나는 김민규. 너는?"

돌아오지 않는 물음에도 꿋꿋이 말을 건다. 가슴께에서 느루느루 대답이 흘러나오지만 입술이 벌어지지 않아 답답할 뿐이다. 그냥 다시 고개를 무릎에 박았다. 벌써 열이 오른다. 머리가 핑글핑글, 현기증이 이는 것이 좋지 않다. 날씨가 이런 사시렁이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은데.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쓸모없는 몸뚱이, 콱 쥐어박고싶다. 코 끝이 찡하고 울린다.

"어디 아파?"

따끈한 몸이 다가온다. 얼굴을 묻은 채로 도리머리를 했다. 어디든 한낮같지 않은 부분이 없다.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한 얼굴을 들어올리는 손길조차 따스해 눈알이 시큰해졌다. 안 돼, 울지마. 이런 따스함이 코 앞에 있으니 다냥한 초원에 홀로 누운 기분이다. 행복하나, 외롭다. 검질기게 눈에 힘을 줘봤으나 당최 말을 듣지 않았다. 볼을 타고 또르르 굴러가는 눈물방울을 되알지게 문댔다. 창피함이 차올라 얼김에 벌떡 일어났다. 가무잡잡한 손이 따라 올라오더니 어색하게 허공을 젓는다. 다물려있던 입을 열고 거우 한다는 소리가.

"...미안."

꾹 먹힌 소리가 듣기에 우심하다. 후두둑후두둑 빗물처럼 쏟아지는 것이 있다. 따라 일어나려는 몸짓을 지나쳐 진둥한둥 방으로 들었다. 푹 젖은 몸으로 이불 속을 파고든다. 이 놈의 비가 갈개꾼인 줄 알았더니, 진짜는 나였다. 베갯잇을 척척하게 적시는 물들이 서러워 더 울음이 샜다. 말 한마디도 섞지 못했다. 이제 다시는 말소리를 듣지 못하거니와 몰래하던 눈바래기질도 어려워질 것이다. 부러 길을 에돌아가서라도 이 곳을 피할지도 모른다. 비가 그치면 나가야지. 비가 그치고, 오래, 오래 있다가 나가야지. 그래도 비가 와서 다행이다. 이 실토정을 내내 듣지 못할테니. 서툴게 잠겼다.


***

이내에 잠겨 어둑어둑한 하늘이 미닫이문 안까지 들어올 때 쯤, 눅눅한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욱씬욱씬, 어딘가 얻어맞은 처럼 쑤시다. 잔뜩 부어 무게감마저 느껴지는 얼굴을 문지르며 문 밖으로 나간다. 휑하게 비어있어야 할 처마 밑에 그 애가 누워있었다. 잠시 뒷걸음질 치다가 색색 숨소리에 가만히 옆에 앉아 잠에 든 그 얼굴을 살핀다. 몸을 구부리고 불편한 자세로 잠든 얼굴이 평화롭다. 괜히 숨을 죽이고 무릎을 가슴팍까지 올려 쭈구리자 그 애의 얼굴이 움찔거린다. 다시 조용조용 들여다봤다. 다시 까무룩 잠에 빠진 건지 미동도 없다.

왜 가버리지 않은 거지.

비가 그친지는 꽤 되었다. 매 봄마다 찾아오는 산돌림은 고개만 디밀고 금세 가버리곤 했으니까. 추울텐데. 쌀쌀한 날씨에 콧물을 훌쩍이다 생각한다. 덮어줄 걸 찾으려 쭈그린 다리를 들자 커다란 손이 손목을 붙잡는다. 깨어있었다. 두려움에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팔을 뿌리친다. 그래봤자 빼빼마른 팔이지만 순순히 손아귀힘을 푼다. 또 다시 눈물이 날 것 같다.

"왜, 왜 안가고..."
"울지마."

마음 같아서는 울긴 누가 울었냐고 성을 내고 싶지만 너무 코 앞에서 추하게 눈물을 떨군 터라 얼굴만 붉힌다.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완전히 울보처럼 보이겠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있는다. 어쩌다보니 벌을 받는 아이처럼 무릎을 꿇은 채다. 허벅지 위에 올려진 손을 단단한 손바닥이 쓰다듬었다. 이런 다정함이 나를 울게하는 거다. 생 모르는 머저리에게 달디 단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고.

***

이틀을 꼬박 앓고도 정신이 멍하다. 몸이 간정되자 봉주 아주머니는 이제 좀처럼 이 곳을 얼씬대지 않는다. 그 이상한 고집을 못 견디겠다나, 내 고집이 아니라 내 몸의 고집을 말하는 거겠지. 식은 땀으로 가득한 몸뚱이를 발견한 아주머니의 괴악스런 얼굴을 떠올리자 실없는 웃음이 샜다. 평소처럼 모가지를 문턱에 걸치고 고개를 빼꼼히 밖으로 내민다. 흙마당은 바싹 말라 그제 있던 일이 거짓말이라고 속삭였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허상에 속아 혼자 청승맞게 찬 바람만 들이 쉰 것이다. 스스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내리지도 않은 빗소리가 토해내는 환상을 받아들인 거라면. 조금 슬프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꼼짝없이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보지 못한 그 애가 머리 한 구석에 콕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겁이 났다. 그제 있던 일만이 아니라 그 애까지 허상이면 어떡하지. 애오라지 생겼던 마음이 폭삭 주저앉는 기분이다. 차가운 손 등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짓눌린 눈알이 먹먹하다. 사실, 이정도 아픔은 견딜만 한 것 같다.

"울어?"

낭랑한 목소리가 퍼진다. 저도모르게 몸을 일으켜 반듯하게 앉는다. 불긋하게 피가 몰린 얼굴이 늘씬한 미소와 마주한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이려다 순간 울컥해 눈을 매섭게 떴다.

"안 울어!"

앙칼진 말씨에 터진 웃음이 청량하다. 안 울면 말고, 미안해. 담벼락에 팔을 걸치고 곧게 바라보는 눈빛이 부끄러워 눈 둘 곳을 찾지 못한다. 아까까지만 해도 겁을 집어먹고 우울해져 있었는데, 신기하다. 여름의 한낮 같이 환하다가도, 이렇게 장난스러운 봄 햇살같이 따스해진다. 삐뚜름한 덧니가 비치더니 밝은 목소리가 떠오른다.

"들어가도 돼?"

의외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잠깐 망설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꾸닥이는 모습이 바보같을 것이다. 성큼성큼 들어와 미닫이 문 앞에 자리잡는다. 옅은 땀냄새와 바람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걷어올린 셔츠에 보기좋은 팔 근육이 살짝 드러나 괜히 제 강파른 팔을 주억거린다. 몇 번 휘적이다 눈이 마주치자 객쩍게 웃었다.

"아팠어?"
"..감기였어."

고작 감기로 이틀을 앓아눕느냐고 생각하겠지. 이 주제를 꺼내고 싶지 않아 하는 걸 눈치챘는지 다른 얘기를 꺼낸다.

"그 고양이 말이야. 까만 얼룩이, 알지."
"응"
"우리 집에 와서 자꾸만 음식을 나눠주다 보니 친해졌어. 그 작은 몸으로 엄청나게 먹더라고. 우리 동생보다 많이 먹는 것 같아."
"동생?"
"응, 여동생 하나가 있지."

그 놈의 괴가 어디서 그렇게 살이 붙어 왔나 했더니, 고개를 작게 꾸벅거렸다. 저를 보려 매일 마주하는 담벼락을 바라보는 그 애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홀린 듯 반듯한 얼굴을 본다. 대답이 없어도 꾸준히 말을 이어간다.

"동생이 이름을 붙여줬어, 솔이라고. 소나무를 좋아한다나. 여기는 매화나무가 있지. 우리 집 뒤에는 소나무 산이 있거든. 예쁜 꽃은 없지만 시원한 향이 그럭저럭 좋아."
"나도,"
"응."
"나도, 보고싶어."
"그럼 같이 보러갈까?"
"그래도 돼?"
"여기서 금방이야. 가름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보이거든."
"그렇구나."

사실 가름길까지는 발 끝도 디뎌본 적이 없다. 이 얇은 몸은 본채 앞마당 가는데도 숨이 모자라다. 대충 아는 척 추임새만 거들어도 충분했다. 어차피 진심으로 하는 말도 아닐테다.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물먹은 솜처럼 빠르게 가라앉는 기분에 멍청한 눈가는 또 소금내를 풍긴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제멋대로 나부대는 마음을 다잡지 못해 구르는 물방울을 재빨리 훔친다. 도르르, 쓱. 도르르, 쓱. 금세 주변이 어둡다.


***


얘기를 듣느라 찬바람을 조금 쐬었다고 또 몸이 욱씬거린다. 꾀꾀로 찾아오던 아픔의 빈도가 잦아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아픔일지도 모른다. 굳게 닫힌 문을 본다. 저 너머에 그 애가 있을 수도 있는 건데. 어쩌면 이 쪽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진짜루 좋겠다. 헤쓱해진 얼굴에 바보같은 미소가 번진다. 얕은 웃음이 기침에 먹혀들어간다. 보고싶다. 베개에게 몇 번을 속삭였는지 모르겠다. 엄마를 찾던 어린 애처럼 중얼거리며 눈물 조각을 선물하기도 한다. 이러다간 다 나으면 찾아올 그 애에게 퉁퉁 부은 얼굴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을 하자.
소나무를 보여준다고 했었지. 종종 책에서 표현되는 소나무를 떠올린다. 얇고 뾰족한 잎, 사시사철 푸른, 어쩌면 그 애를 닮은 듯하다. 높은 소나무로 덮인 야트막한 산에서 그 애와 내가 웃고 있는 상상을 한다. 녹색 잎들 사이에 곧은 햇살이 그림자로 어두운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솔이는 그 햇살을 집으려 조막만한 발을 놀린다. 그 애가 햇살보다 밝게 웃으며 무어라 외치면 나도 따라 힘껏 소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베개가 머리칼을 적실정도로 젖었다. 형태를 알 수 없는 것이 마구잡이로 찾아온다.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어졌지만 가만히 눈을 감는 것을 택한다. 연습했잖아, 매일 자곡자곡이, 가만히 누워서 말이야. 그럼에도 쏟아지는 아픔은 그 애를 향한 것이다. 부끄러움인지 미안함인지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했다. 또 마음이 잔뜩 쓰리다. 혀 끝에서 산뜻하게 걸리는 이름을 맘껏 되뇌이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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