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얀 뭉게구름, 그 틈으로 비치는 눈부신 푸른색. 이질적이다. 조롱에 가까운 찬란에 소년은 눈을 찌푸렸다. 공기에는 잿개비와 탁한 연기가 떠다닌다.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를 떠돌던 훌쩍임이 서서히 멈췄다. 맨발바닥은 사정없이 찢어져 지나온 길에 붉은 도장을 찍었지만 심장의 고통에 가려진다. 돌더미가 된 집 위에서 소년은 생각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가을의 청량을 덮는 탄내. 그리고 그 탄내를 감싸는 희미한 피와 고통의 냄새. 몸속으로 스며드는 절망은 깊이 가라앉은 생각 중에 사라진다. 이 냄새는 누구의 것이지, 누구의 손에서 시작됐을까? 먼 길을 날아온 낙엽이 귓가에 속삭인다. 어린 소년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듯하다. 날카롭게 찢어진 어미의 심장은 왼쪽, 형체도 없이 뭉개진 아버지의 하체는 오른쪽, 마른 어깨에 아픔 이자 책임을 걸친다. 지수의 얼굴에 젖은 미소가 피었다. 복수는 또다시 맑은 물에 탁한 지혜를 쏟았다. 재앙이 휘저어 놓은 도시를 떠난다. 2 얕은 진동에 원우는 식은땀에 잠긴 몸을 일으켰다. 여섯시 정각.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이르다.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대를 나섰다. 발을 딛곤 당연하게 따라올 고통을 기다렸지만 얄팍한 저림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방 앞에 놓인 신문을 책상 위에 안착시킨다. 대충 훑은 신문의 헤드라인은 여전히 폭력적이었다. 대통령의 테러 지역 방문, 미국 센티넬 연쇄 살인... 이름도 모르는 연예인의 구설수가 나오자 원우는 신문을 접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창백했다. 원우는 거울 속 자신의 눈을 피하며 목 소매를 끌어내렸다. 붉은 수치는 칠백을 웃돌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간신히 세 자릿수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는데. 묘한 기대감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준비를 마치고도 가라앉지 않는 마음이 낯설다.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운다. 단 하나 남는 기억이 띄는 냉기. 잔잔한 얼굴이 차가움을 둘렀다. - "몇 년 만이지? 팔 년?" "구 년." "와, 난 하루만 가이드 없어도 죽을 것 같던데." 빨대를 쪽쪽 빨며 순영이 감탄을 뱉었다. 맛없기로 유명한 코코넛 주스다. 원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입 밖에 낼 필요가 없는 말은 삼키기로 한다. 사실 순영에 말에는 동의하고 있다. 가이드를 만나고 나니 그전으로 돌아가는 건 꿈도 꾸기 싫어졌다. 지수를 떠올리자 웃을 때 원우의 머릿속에 휘어지는 눈꼬리며 입꼬리가 떠다녔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지.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에 순영이 웃으며 숨을 들이켰고 텅 비어버린 캔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났다. 이제 들어가야지, 뻐근한 몸을 터는 순영의 눈에 그 새 익숙해진 얼굴이 띄었다. "니 가이드 와 있네." "응, 센터 돌아다니다가 맞춰서 오더라." "센터 볼게 뭐가 있다고 돌아다닌데. 나 먼저 간다." 한 손으로 캔을 우그러뜨린 순영이 저 멀리 쓰레기통으로 캔을 명중시킨다. 텅, 하는 소리에 지수가 원우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다. 기다렸다는 듯 퍼지는 미소. 원우는 뒷목을 쓸었다. - 가지런히 깍지를 낀 손은 퍽 다정했지만 둘 사이에는 정적만 감돌았다. 얕은 웃음이 퍼진 지수의 얼굴은 넓은 필드를 뜯어보며 달처럼 한 면 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스킨십을 의식하기는커녕 원우의 존재조차도 인식하지 않고 있다. 괜히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드디어 정면. 불쾌감이나 당황 따위는 조금도 섞여있지 않다. "많이 아파?"
늘 지수를 겉돌게 만드는, 혹은 다른 존재를 거두는 평이함이다.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이상 각인이 없어도 감정 공유는 불가피한 일. 그럼에도 원우에게 넘어오는 감정 이라고는 늘 미미한 기쁨에 그쳤다. 지수의 손에는 원우의 손자국이 남을 게 분명하다. 벌써 파랗게 멍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지수는 다정한 혀를 굴리는 것이다. 원우의 볼이 씰룩이고 입이 열렸다.
"남자랑 자본 적 있어요?" "뭐?" "이제 나랑 자야할 거 아니에요. 뒤로 한 적 있냐고요." 무례하다못해 멍청한 말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뭐. 답지않게 뻔뻔하다. 마른 입술을 훑으며 지수를 봤다. 오묘하게 꿈틀거리는 미간이 보기 좋았다. 유치한 심술, 어설픈 도발. 원우는 물론 지수도 알고 있었다. 뭉근하게 흘러들어오는 당혹감에 원우는 희열을 느꼈다. 우습게도. 찌푸렸던 눈썹이 곧게 펴졌지만 약간은 떨떠름하다.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수가 원우를 내려다 봤다. 짙은 눈동자와 마주친 눈이 가볍게 접힌다. 졌다, 홍지수는 또 말없이 웃는다. - 결국 순영에게 한마디 들었다. 원우는 함구했으나 지수가 필드에 발길을 끊은 탓이었다. 구 년만에 찾은 가이드에게 잘해주진 못할망정 일주일 만에 쌩을 깠냐, 전원우 성격 참, 하루 종일 눈을 흘기는 통에 그 새 오백을 넘긴 수치가 육백까지 올랐다. 겨우 며칠 보지 못 했다고 눈 앞이 침침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더만, 생각보다 뒤끝이 있는건지. 사과를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에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가이드의 심사 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먼저다. 필드를 나와 복도로 들어서는데 순영의 외침이 뒷덜미를 잡는다.
"전원우!"
느리게 뒤를 돌아본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어 순영은 잠시 멈칫한다.
"왜.“ "그냥, 가이드 찾으러 가냐?“ "응.“ "만나면 뭐든 사과해라. 잘 좀 챙겨, 줘."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는 모습에 원우가 미간을 좁혔다. 기본적으로 싹싹한 성격이긴 해도 이렇게 남에게 신경을 쏟는 스타일은 아니다. 무슨 얘기를 들은 게 분명하다. 아닌 척 해도 순영은 슬픈 사연에 약했다. 원우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순영이 먼저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며 눈동자를 굴리는 얼굴이 곤란하다. 그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순영의 모습에 오히려 호기심이 동했다.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연다.
고아래. 센티넬 전쟁, 그때 두 분 다 돌아가셨다더라. 3 순영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손끝을 부볐다. 연해진 피부는 가벼운 마찰에도 통증을 뱉는다. 숨을 들이쉬며 걸음을 멈췄다. 한숨을 쉬고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뜨린 원우가 입술을 씹는다. 숙였던 몸을 일으켜 걸음을 서둘렀다. 일말의 양심, 아니, 미안함이 원우를 달리게 한다. 텅 빈 복도에 공허한 발소리가 울리고 순간, 지수의 감정이 솟구쳐 몰려왔다. 엷게 숨을 몰아쉬며 선 문 너머에서 지수의 공기가 느껴졌다. 센터 간부의 개인 사무실. 문패를 확인하자 욱신거리는 머리의 통증이 전신으로 흘렀다. 왜 이곳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노크할 여유도 없다. 들어가서, 사과, 아냐, 먼저 손이라도 잡자. 문고리를 잡은 손바닥마저 겉 피부가 온통 사라진 듯 쓰라렸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문이 열리고 방 안에 퍼진 편안한 향기, 그리고 피 냄새.
피 냄새?
예민해진 몸은 시각보다 후각이 지배했다. 어지럼에 눈앞이 흐릿한 이유도 있었고, 공기 속에 섞인 피비린내는 어쩐지 공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꼼꼼히 닦은 듯하지만 여전히 드문드문 핏자국이 묻은 베이지색 러그가 뒤늦게 눈에 들어온다. 수습이 덜 된 사건 현장. 그 안에 들어온 이질적인 두 존재. 머리가 왕왕 울리는 와중에도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죽었고, 이곳에는 홍지수가 있다. 피는 홍지수의 것이 아니다. 그럼, 홍지수는. 젠장, 불그스름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중에 또렷한 이국의 단말마가 이마를 강타했다. 고개를 듦과 동시에 날아오는 무언가를 걷어냈다. 당황한 손이 던진 나이프는 위태로운 자세로도 가볍게 쳐낼 수 있었다. 반격, 을... 휘청이며 팔을 들어보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초점이 맞춰진 동공으로 피 묻은 인영이 비쳤다. 뒤통수에 꽂히는 진실. 무표정한 얼굴은 지수의 것이 맞았다. 흔들리는 눈빛이 잘게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놀랄 것 까진 없는데."
깨끗한 볼에 문대 진 엷은 핏자국이 상황을 고정시켰다. 곤란한 웃음은 형형한 눈빛을 받자 한 발 멀어졌다. 태연한 듯 보이지만 지수도 예상 못한 상황이었다. 원우가 이를 악물었다. 고통도 질문도 많은 표정이었지만 지수는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꽤나 오래 이어지는 정적에 지수가 눈을 굴리곤 피 묻은 얼굴관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이성의 손목을 붙잡던 무언가가 튕겨져 나간다. 원우는 입보다 발을 먼저 뗐다.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갔다. 원우의 거친 숨이 쏟아진다. 상태가 이상하다. 지수의 등 뒤에 식은땀이 구른다. 아, 진짜 망했네. 마주친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며칠 접촉에 소홀했던 결과가 이렇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원우가 괘씸했다기보다는, 착실히 진행되는 계획을 조금만 더 붙잡고 싶었다. 얇은 니트를 끌어올리는 손길을 지수는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이번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뜨고 싶지 않다. 팔을 뻗어 쇄골을 물어뜯는 원우의 뒤통수를 감쌌다. - 얇은 목덜미를 단단하게 누른 원우가 다른 한 손으로 지수의 꽉 다물린 구멍을 쑤셨다. 새어 나오는 소리를 억누르는 숨결이 가빴다. 벗지도 못한 니트가 흘러내려 등이 죄 드러났다. 마른 상체는 원우의 폭력적인 애무에 멍으로 얼룩졌고, 뻑뻑한 뒤를 파고드는 손가락에도 원목 책상 위에 얼굴을 묻고 들썩인다. 얇은 몸은 거친 손길에 따라 흔들리기만 했다. 힘줄이 튀어나온 손이 뒷목에서 떨어지고 결 좋은 머리칼을 틀어쥔다. 지수가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머리채를 쥐고 빨갛게 올라오는 핏망울을 바라보던 원우가 지수의 구멍에서 뺀 손으로 급하게 버클을 풀었다. 줄어드는 고통에 묽게 풀려있던 얼굴이 필사적이 됐다. 이미 단단하게 솟은 성기를 구멍에 걸치곤 터진 입술을 핥는다. 눈을 감고 가만히 받아들이는 지수를 원우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본다. 허리를 들이밀자 코앞의 단정한 얼굴에 균열이 생긴다. 목이 따끔거리며 기분 좋게 통증이 수그러든다. 귀두만 끼웠을 뿐인데 지수는 입 맞추던 원우를 밀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원우가 아랑곳 않고 한 번에 넣었다.
"읏, 흐... 악!"
툭, 하는 느낌과 함께 아릿한 통증이 밀려온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지수가 단말마를 뱉는다. 원우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동시에 움직임이 가팔라졌다. 한 번 터진 입술을 다시 악물자 피딱지가 다시 뜯겼다. 간간이 내뱉는 숨만 느껴진다. 피비린내를 머금으며 숨까지 참아내는 모습이 원우는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는다.
"읍, 흐, 으-” "숨 쉬어요.”
강압적인 목소리가 갈라져 나온다. 위압감에 숨을 들이켠 지수가 입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살짝 물고는 가는 숨을 흘렸다. 자존심을 버리는 일은 지수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수는 최대한 몸을 늘어뜨렸다. 홧홧한 뒤가 조금은 유연해지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피를 윤활제 삼아 원우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마른 몸이 거친 움직임에 따라 책상과 마구 부딪혔다. 핏방울이 엉겨 부드러워진 구멍이 찔리며 지수는 덜컹거렸다. 아파, 짜증 나. 찢어진 뒤는 원우의 추삽질을 받아낼 때마다 아릿한 통증을 뱉었다. 불규칙적으로 내벽을 찌르는 원우의 더운 숨이 귓가에 떨어져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른다. 짐승, 새까만 흑표의 교미가 이런 느낌일까. 지수는 자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잊을만하면 머리채를 잡고 입을 맞춰 입술도 너덜너덜하다. 키스라고 하기엔 공격적인 입맞춤을 받아내는 동안에는 숨이 부족한 듯 헐떡이다 비틀대며 원우를 밀어냈다. 몰아서 하는 호흡 중에도 원우는 계속 몰아붙여 잔뜩 쉰 목소리가 힘겹게 신음소리를 냈다.
“잠깐, 아, 흐, 잠깐만...”
웬일로 지수의 휘적거림에 순순히 물러난다. 깊게 박혀있던 성기도 천천히 빼고 책상에 흘러내릴 듯 엎어져있는 지수의 등줄기를 손끝으로 훑었다. 아직도 검붉게 서있는 자신의 성기를 몇 번 손으로 주물거린 원우가 늘어진 몸을 들어 올렸다. 지수의 몸에선 제가 남긴 흥분의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축 늘어진 지수의 성기가 흘러내린 셔츠로 반쯤 가려진다. 원우는 태연히 발을 옮겼다. 빈 임원 사무실이니 이어지는 쪽방이 있을 것이다. 지수를 고쳐 안은 원우가 팔을 올려 지수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걸음걸이에 맞춰 한 번씩 세게 빨아들인다. 찡그린 얼굴이 지친 듯 떨궈져도 계속해서 흔적을 남겼다. 깨끗한 목 군데군데 붉은 마킹이 얼룩졌다. 작은 침대에 가볍게 눕혀진 지수는 눈도 뜨지 못하고 울음을 참았다. 지수의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원우는 불긋한 눈가를 손으로 쓸곤 또다시 곧바로 삽입한다. -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
여태까지 들은 나긋한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어투였다. 차갑게 깔리면서 동시에 이글거렸다. 약간의 떨림마저 느껴진다. 강렬하게 넘어오는 수많은 감정에 원우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의외다 못해 심각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왜 안심이 되는 건지 원우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장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원우가 내리깐 눈을 들어 지수를 봤다. 침대 위, 멀찍이서 앉아있는 지수는 평정심을 찾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꽤나 불안정하다. 어느 정도 경계심이 담긴 얼굴. 흥미로움으로 번뜩이는 눈이 그 경계를 관찰한다.
“도와줄게요.” “뭐?” “도와준다고요, 죽이는 거.” “아, 아니, 무슨 뜻인지는 아는데. 네가 왜?” “그냥, 심심하니까?” “제정신 아니구나.” “그럼 그냥 지금 잡힐래요? 내가 신고하면 되잖아. 나는 상관없는데.” “가이드 없어도 괜찮나 봐?” “센티넬은 가이드가 수감 중이어도 규칙적으로 만날 수 있게 돼 있거든. 알아서 해요.” “너 정말...”
퍽 날카롭게 터지는 말들에도 원우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느긋하게 책장 옆 의자에 앉는다. 피하지 않는 눈이 지수의 말보다 예리했다. 새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던 지수는 고개를 돌렸다. 원우의 흑색 동공이 자신까지 빨아들일 것 같았다.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시간을 쪼개는 정적. 무한히 이어질듯한 고요는 원우가 표정을 풀고 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무너졌다. 얇은 목덜미 위로 손끝을 느슨하게 굴린다. 이렇게 손쉽게 관계의 우위에 섰다. 여유가 등허리를 감싼다. 떨리는 목 언저리에 자리 잡은 검붉은 얼룩들. 자신의 증거를 내려다보며 순응을 독촉했다. 지수는 어느새 피식자의 모습을 한다.
4 센터의 수장, 박서진은 정부 기관의 우두머리치고는 어린 나이였다. 이제 막 삼십 대의 마지막을 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남들보다 이른 기회를 얻은 이유는 13년 전 센티넬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영웅이었다. 목 언저리에 큰 흉터를 달고 다니는 그는 위풍당당했다. 입을 다물 고도 센티넬로써 할 수 있는 가장 평화적이고 큰일을 해낸이라 나불대는 것 같았다. 그는 일반적으로 존경을 샀다. 센터 일이라고는 연설 나부랭이밖에 안 한다는 투덜거림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랬다. 센터 사람들이나 내부의 일에 관심이 없는 원우조차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그, 박서진?” “응. 네가 아는 그 박서진.”
그 박서진이 지수의 복수 상대였다. 영웅이 누군가에게는 범인이었다. 전쟁의 시작과 연관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원우가 중얼거리자 지수는 복수에 무슨 타당한 이유를 댈 필요는 없잖아, 하고 구린 뒷이야기를 한 마디로 일축 버렸다. 사실 뒤 구린 게 걔뿐은 아닌데 다 죽여서, 걔만 남았어.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허,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필드를 구경하던 지수도 원우를 보며 웃어줬다. 원우의 머릿속에 질문이 빠르게 갱신된다.
“미국 센티넬 연쇄살인은?” “그거는 같이 한 거구.”
다시 필드로 눈을 고정한 지수가 조곤조곤 말한다. 거기도 있거든, 아니 거기가 더 많으려나. 암튼 센티넬 전쟁이 한국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그쪽 인간들도 많이 엮여있어서 여차저차, 도움도 받았지. 처음 엄마 아빠 죽고 거기로 옮겨져서 고아원에 있다가 그 사람들 만나서 배울 거 배우고. 하암- 태연하게 하품까지 한다.
“더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아니면 나 가서 좀 잘래.” “감정 공유 피하는 거도 거기서 배웠구나.” “엉, 근데 마킹 당해서 헛수고 됐지.” “센티넬이 있었나 보네요.” “응? 아니. 센티넬은 없었어.” “그럼 센티넬을 어떻게 죽여요. 일반인이?:” “당연히 가이드 먼저 죽여야지.”
계속해서 나오는 하품이 대화와 어울리지 않아 원우가 낮게 웃었다. 밤에 잠 못 잤어요? 친근한 말은 목뒤로 삼켰다. 지수는 찔끔 나온 눈물을 닦는다. 그럼 나 자러 간다,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지수가 나른하게 일어났다. 허리를 짚으며 어정쩡하게 걸어가는 게 우습다. 원우도 엉덩이를 털었다. -
붉은색을 넘어 푸르스름해진 등허리가 검은 면으로 깔끔하게 감싸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원우는 눈동자를 굴렸다. 제가 낸 손자국이라는 것이 약간은 믿기지가 않았다. 대충 앞머리를 정리한 지수가 드디어 거울 너머 원우와 눈이 마주친다. 숨기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곤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가만히 서 있는 원우를 뒤를 돌아 마주 봤다.
"왜?" "어디 가게." "그냥, 뭐."
말이 겹쳐도 물리는 소리는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원우의 표정에 지수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보부, 가야 돼. 바닥에 꽂히는 어물거림을 기민하게 잡아채곤 원우도 겉옷을 벗었다. 어두운색의 가디건을 걸친다. 문을 열고 지수를 보는 눈이 차분했다.
"뭐 해요, 안 가?" "아, 너도? 으..."
왜, 하는 뻔뻔함이 잔뜩 묻은 원우에게 지수는 입을 벙긋벙긋하다 한숨을 쉰다.
"...가자."
포기한 듯 말을 삼키는 지수에 원우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지수가 문을 지나고 부드럽게 문을 닫았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지수의 방. 조용히 걷는 지수의 뒤를 여유 있게 뒤쫓는다.
-
익숙하게 보안을 푸는 모습에 원우가 소리 없이 혀를 내둘렀다. 정보부의 넓은 어둠이 지수 앞의 컴퓨터 빛에 은은하게 갈라진다. 갈색 동공에 화면이 비쳐 번들거렸다. 키보드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울리며 왠지 모를 안정감마저 줬다. 화면을 들여다보자 알 수 없는 숫자만 빠르게 지나간다. 호오, 흥미롭게 들여다보다 지수의 어깨에 턱이 부딪혔다. 지수가 고개를 돌리며 눈을 흘겼지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까워진 간격에 원우는 얼굴을 빼야 하나 잠시간 생각에 빠졌다.
지수는 원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코끝을 마주한 채로 눈동자가 저쪽 문에 고정되어 있다. 시선을 따라가 보지만 그냥 문이다. 뭐야, 말을 꺼내려 입을 벌리자 지수가 곧장 눈을 마주한다. 쉿, 손가락을 원우의 입술에 올리더니 커다란 눈이 데구르르. 곧바로 손을 빠르게 키보드에 올려 화면을 끈 지수가 원우를 끌고 벽에 붙은 책장 끝으로 몸을 숨겼다. 차가운 철제 책장이 등에 닿는 감촉에 소름이 돋는다. 원우를 밀어붙이고 원우의 가슴팍에 지수가 바싹 붙었다. 얇은 티 너머로 느껴지는 지수의 가슴팍이 잔잔하게 들썩인다.
천 두장을 사이에 두고도 지수는 원우에게 편안함을 줬다. 온통 지수에게 쏠린 긴장이 그대로 안락해졌다. 맞닿은 곳이 기분좋게 따스해 상황과 맞지 않게 나른하기까지 했다. 발걸음이 울리고 손전등 불빛이 한 치 옆을 비껴가지만 원우는 파르르 떨리는 지수의 속눈썹만 들여다 봤다. 매끈한 콧대에 어두운 푸른빛이 돌고 노란 손전등 불빛에 따스함과 차가움을 오간다. 마른 침을 넘기는 목젖. 똑 떨어지는 어깨의 부드러운 직선. 딱지가 앉은 입술에 눈길이 멈추고 묘한 죄책감과 쾌감이 지나갔다. 발소리에 집중하는 지수는 자신과 맞붙은 센티넬의 눈치를 살필 여력따위 없어 원우는 찢어진 얇은 피부에 손쉽게 입술을 얹었다.
동그랗게 커진 눈이 원우를 향했다. 관심이 받고 싶은 건가, 홍지수한테. 원우는 언뜻 스친 성찰에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커졌다가 찡그려졌다가 곤란한듯 눈썹을 늘어트리는 모습에 손가락이 저려온다. 이상해지고 있었다. 어깨에 올라오는 지수의 손에 저릿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
"자고 가도 돼?"
뻔뻔한 질문. 한 편으론 너무나 의외인 질문. 원우는 자신도 몰래 제 입에서 나온게 아닌가 싶었다. 돌아오는 내내 말없이 걸었던 지수가 원우의 방 문 앞에서 저런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고개를 기웃했지만 뒤를 돌아 저를 보는 것은 지수가 맞았다. 잠시 말없이 서 있자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네 방에서 자고 가도 되냐고."
조용히 떨어지는 말이 또렷해 원우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간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다. 이어진 감정은 우울함을 말하는데, 겉보기에는 짜증이 조금 난 평소의 지수다. 보안실에서 입을 맞추는 순간부터 한 대 얻어맞을 준비까지 한 것 치고는 삼삼한 결과다. 찝찝한 기분이 마킹 전 지수를 대할 때 같았다. 원우는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발을 뗐다. 원우가 방으로 들어오자 스스럼없이 원우의 티를 펼쳐보던 지수가 고개를 돌렸다. 이미 바지는 벗어던지고 없다. 마른 다리가 훤하게 드러나 원우는 부엌으로 슬쩍 몸을 피했다. 언뜻 비치는 허리춤보다는 다리의 멍이 훨씬 나았다. 자신이 남긴 멍을 볼 때마다 이상해지는 기분을 원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옷 좀 꺼냈어. 입어도 되는 거 맞지?" "아, 네. 먼저 씻어요." "응, 고마워."
지수가 사라지자 그제야 부엌에서 나와 침대에 걸터앉는다. 남색 시트가 구겨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등을 뉘였다. 지수와 오래, 깊이 접촉해있어 몸은 한없이 상쾌했지만 머리 속은 안개가 자욱했다. 천장만 바라보며 신발을 벗고 꿈틀꿈틀 슬리퍼를 신는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허연 천장이 울렁거렸다. 생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시작됐다. 지수의 계획을 망치고 싶다던가, 위험한 상황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수와 닿지 않으면 안될만큼 심각한 상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망가진다. 지수와 함께 있으면 이성의 끄트머리부터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지수의 몸에서 발견되는 흔적들에 두려움과 애착을 느끼며 동시에 그 날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놓아버린 이성의 실낱으로 남아 작은 파열음을 내며 끊어지는. 환하게 휘어지는 눈과 입술보다 굳은 표정이나 시퍼런 멍에 더 크게 반응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섹스라고 하기엔 맹목적이었던 마킹을 떠올리게 하는 그 무언가들. 그 무언가들만 사라진다면, 더 이상 이상해지지 않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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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종종 스스로를 징벌이라 칭한다. 뻔한 거짓말로 선한 양심을 가장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수의 복수는 정직했다. 투명한 복수는 원우를 흔들었고, 그 복수의 실행자는 원우를 뒤집어 놓았다. 원우는 어슴푸레한 새벽에 눈을 떴다. 눈 앞엔 지수의 잠든 얼굴이 있다. 모두의 핏빛 자오선. 연한 어둠 속을 서늘하게 비추는 붉은 숫자를 더듬었다. 지수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눈 뜨는게 제일 힘들었어. 말라붙은 피 때문에 속눈썹이 이렇게, 붙어서는. 눈물에 축축하게 피가 녹아내려갈 때 쯤에나 시야가 트였지. 가장 먼저 보인 건 하늘.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 그 하늘 아래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고, 살아있는 내가 있었고.
지수를 지나간 것들이 원우의 새벽을 무너뜨린다. 축이 기울고 또 기우는게 느껴지지만 눈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베개도 없이 웅크린 지수의 미간이 움찔거린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안쓰러워 지수의 머리를 들고 조심스럽게 팔을 끼워 넣었다. 몇 번의 웅얼거림 이후에 동그란 이마가 마른 가슴팍에 닿았다. 잠에 빠진 숨소리가 나지막하게 심장 박동을 조각낸다. 소리없이 연주되는 음악. 촘촘해지는 새벽의 공기. 낯선 기분을 거둔 아늑한 감정이 쏟아지고 원우도 눈을 감았다.
/ 사랑, 살아있기만 하다면 그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그러한 사랑은 고독한 자에게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씁쓸한 숨에 취한 원우의 방백은 잠과 함께 무너졌다.
5 몇 년 만의 외출이었다. 원우의 사적인 외출은 보통 순영의 제안으로 이루어졌고, 순영의 가이드가 들어온 뒤에 순영은 굳이 원우가 꺼리는 외출을 권하지 않았다. 제어 팔찌가 싫어, 무심하게 뱉는 말은 꽤나 진심이었다. 그런 원우가 가이드와 함께 외출이라니. 순영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가이드와 함께 사라졌다. 센티넬의 휴식은 일괄적으로 이루어진다. 매달 몇 째주는 무슨 팀의 휴가, 매주 무슨 요일은 무슨 팀의 외출이 있었다. 원우의 방해가 있던 와중에도 지수는 박서진의 가이드가 센터 내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치까지 확보했다. 그리고 오늘, 익숙하게 침대에서 대화를 나누다 외출 이야기를 듣곤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단체 외출이라니, 잘 됐다! 하곤 엉겁결에 일어나 졸린 눈을 끔뻑이는 원우를 이끌었다. 우습게 뜬 원우의 머리가 붕붕, 걸음마다 들썩였다.
"어떻게 가는지는 알아요?" "아니, 너는 알아?"
지수가 베이지색 코트에 손을 꽂아넣고 유유자적 걸음을 옮기자 원우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어디서 나오는 여유인지. 덜 마른 머리를 털었다. 공기가 퍽 쌀쌀하다. 입김을 뿜으며 눈을 빛내는 지수의 옆에서 걸음을 맞춘다. 미국에서 오자마자 센터에 갇혀지냈으니 바깥 구경이 즐거울 법도 하다. 날이 서있는 지수가 아닌 어딘가 한껏 풀린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올라간 입꼬리에 원우의 입술도 호선을 그었다. 거기 아니에요, 맹하게 옆길로 새려는 지수를 붙잡고 버스 정류장에 멈춰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산한 버스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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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오후에도 사람이 많은 번화가였다. 꽁꽁 숨겨놓은 것 치고는 번잡한 곳에 있네. 자꾸만 다른 곳으로 사라지려는 지수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놓고 사람들 사이를 박박 통과한다. 케이크 가게며 쥬얼리샵이며 할 것 없이 멈춰서는 지수 덕에 속도는 더뎠다. 입까지 헤 벌리고 높은 건물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점점 벌어지는 입술이 우스웠다. 입가에 눈길을 뺏겼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큼큼,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마른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미국에는 이런 거 없나?" "음... 있는데, 나는 잘 못 가봤어. 와, 이게 뭐야?" "마카롱이요." "이런 건 처음 봐. 장난, 장난감 같다." "단거 좋아해요? 먹어볼까?" "응, 먹을래."
알록달록한 마카롱 진열대에서 눈을 못 떼는 지수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갔다. 단출한 가게 안은 너덧의 사람으로도 복작거렸다. 곧장 계산대로 가는 원우와 달리 지수는 여전히 주변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여기 있어요. 연보라색 케이크에 시선을 뺏긴 지수에게 당부했다. 친절한 표정의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원우를 맞았다. 마카롱은 순영을 따라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다. 혀가 아릿하도록 단 맛이 났고 다시는 먹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쏠트 카라멜하고, 커피 좋아하니까 커피랑... 피스타치오는 싫어하나? 눈으로 마카롱을 훑던 원우가 지수 쪽을 돌아봤다.
"피스타치오... 아, 정말."
무슨 애도 아니고. 그새 사라진 지수에 원우가 뒷목을 주물렀다. 아직 은은하게 흔들리는 도어벨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대충 사과의 말을 던지고 문을 민다. 다행히 바로 길 건너편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또 뭐에 홀렸는지 뻔하게 보였다. 아쿠아리움, 파란 고깔모자를 쓴 돌고래 앞에서 멈춰있던 지수가 뒤를 돌아 원우를 봤다. 몽글몽글, 지수를 따라 뿜어지는 감정에 원우는 웃으며 얼굴을 쓸었다. 거기서 기다려요. 내가 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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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푸른색이 덩어리져 지수의 얼굴을 색칠했다. 부드러운 헤엄을 눈으로 좇으며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 역시 심해의 색으로 물든다. 고개를 돌려 유리 너머를 응시했다. 수많은 눈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췄다. 원우는 바다를 좋아했다. 센티넬이 되기 전, 어린 원우의 방학은 늘 바다에 쏟아졌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가 쓸려내려가는 기분이 좋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젖어 머리끝부터 서늘해질 때의 소름이 좋았다. 턱끝까지 들어차 숨막히게 하는 파도가 좋았다. 물고기 비늘처럼 빛나며 자글거리는 수면이 좋았다. 눈을 뜨면 어둡게 들이차는 깊은 바다가 좋았다. 그 짭쪼름한 물냄새와 비린내마저 좋아했다. 햇살에 말라버린 물기, 그 후에 나타나는 소금 역시 우습도록 좋았다. 심장이 축축하게 그리워졌다. 우울함과 산뜻함이 동시에 밀려오고 지수의 눈이 원우를 향했다.
"바다, 좋아하는 구나." "응. 정말 좋아했어요."
좋아, 했어요. 묘하게 정정된 말이 약간은 서글펐다. 머리가 둥근 물고기가 유리 근처로 다가왔다. 지수는 창에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눈앞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에 지수의 얼굴에 사근한 웃음이 피었다.
"나는 바다 한 번도 안 가봤어."
부드럽게 유영하는 지느러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수가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항상 가보고 싶었어. 바다가 아니더라도 물로 가득찬 곳에. 숨이 잠길 정도로 많은 물이 있고, 쉽게 넘쳐버리기도 하는. 무신경하게 뱉어지는 말은 오늘 내내 보았던 지수의 들뜬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아직도 푸른빛이 영롱한 눈동자는 물살을 가른다. 닮았네. 문득 생각했다. 홍지수는 물과 닮았다. 찬란하게 햇빛을 쪼개는 해수면은 새하얀 미소고, 아득한 심해의 어둠은 썩어들어간 심장이다. 복수라는 거대한 불꽃에 끓어 달아올랐지만 먼저 무언가를 태워버리는 법은 없는 물. 서서히 적셔 찢어버리는 것이다. 까마득하게 잠겨 죽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엔 진짜 바다 가요." "그럴까?"
무심하게 건넨 말에 지수가 화색을 띄고 말했다. 원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순간적으로 뇌까린 말이지만 진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눈부신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지수의 울음이 바다로 떨어지는 것이 보고싶었다. 가요, 지수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긴다. 잠깐 그런 걱정이 들었다. 지수가 바다에서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느낄 새도 없이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지수는 너무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지. 갑작스럽게 뇌까린 말은 나직했다. 원우가 지수의 옆얼굴을 바라봤지만 지수는 원우를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맞닿은 피부의 온기를 느끼며 원우는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느리게 가라앉는 지수, 하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익사할 만큼 깊은 바다가 그 어디 남아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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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거창한 오피스텔은 복도부터 화려했다. 느리게 복도를 가로지르면 원우는 고갯짓으로 씨씨티비를 망가트렸다. 미국에선 맨날 꽁꽁 싸매고 다녔는데, 너랑은 가드 하나 기절시키면 끝이네. 날아다니는 파편들을 눈으로 좇으며 지수가 중얼거린다. 금색 문 몇개를 지나고 원우의 걸음이 멈췄다. 여기 맞죠? 지수가 고개를 끄덕이곤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도어락을 풀었다. 마른 침을 삼키는 원우와 달리 지수는 혼연하다. 고급스러운 내부는 사람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갈한 거실을 지나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히고 다녔다. 쓸모가 확실한 방들은 쓰여지지 못하고 있었다. 원우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자 지수도 눈썹을 늘어뜨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 방이었다. 문고리는 여전히 부드럽게 돌아갔다. 열린 방 문 너머에는 커다란 침대 하나가 있었다. 침대가 큰 건지 그 침대를 의지하고 있는 인영이 작은 것인지. 원우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문턱을 넘지 못 했다.
"쟤가, 그 가이드에요?" "...그런가 봐."
곤히 잠든 얼굴은 잔뜩 앳된 것이 열댓 살을 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면 포동포동해야 할 볼도 수척했고 마른 손목으로는 커다란 바늘을 통해 누런 액체가 떨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게? 원우가 멈춰 선 지수의 귀에 속삭였다. 이마를 덮는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린 지수가 한숨을 쉬었다.
"어떡하긴, 죽여야지." "진심이에요?" "응." "그냥 아동 가이드 착취로 엿 먹일 수 있잖아. 적어도 오십 년은 감옥에서 썩힐 수 있어요." "원우야, 아파."
어느샌가 지수의 팔뚝을 꾸욱 쥐고 있었다. 찡그린 얼굴을 보자 살짝 정신이 들었다. 손을 내리고 이마를 짚는 원우의 손목을 지수가 가볍게 쓰다듬 듯 잡는다. 원우야...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눈이 접히고 더 튀어나오는 통통한 애교살이 한없이 선해 보인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어 약간은 반색을 했다.
"그게 무슨 복수야."
해맑은 미소를 뒤집어쓰고 그렇게 말했다. 어떤 화사함이 무색하게도 지수가 걸어온 길은 잔인하다. 따스한 손으로 잡힌 손목이 아려온다. 알아 들었어? 다정하게 다가오는 물음을 받아들이는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멍하니 아이에게 다가가는 지수를 관망한다. 복수, 정의는 홀가분하게 씻어내린 맹목적인 의도에 온몸이 뻣뻣해졌다. 이불을 걷고 마른 몸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리구나. 지수가 아이의 볼을 쓸어내린다. 부드러운 접촉에 살며시 눈이 뜨였다. 안녕, 작게 인사하는 소리에 원우의 굳은 머리가 다시 제정신을 찾았다. 예쁘게 웃는 모습에 혹시, 하는 마음이 들지만 더는 속지 않는다. 속지 못한다. 성큼성큼 걸어 아이의 목으로 다가가는 지수의 손을 낚아챘다. 지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가라앉은 눈을 마주한다.
"원우야." "...안 돼요." "얼른 놔." "꼭 죽일 필요 없잖아." "원우야, 내 복수야."
얼어버린 표정의 지수는 어느 때보다 형형한 눈빛을 했다. 원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풀어버린다. 두려움에 질려 창백해진 아이를 지그시 바라본 지수가 가는 목에 손을 올렸다. 미안, 팔에 힘을 불어넣으며 지수는 살짝 속삭인다. 아이는 숨을 앗아가는 지수를 올려다봤다. 눈을 감고 입술을 꾹 문 모습이 괴로워 보인다. 불쌍한 사람이네,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순간 목을 짓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유독 가볍게 느껴지는 몸이 풀썩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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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눈을 깜빡거린 지수가 원우의 얼굴을 발견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몸이 휘청거린다. 눈에는 잔뜩 핏발이 서 살벌한 기색이었다. 원우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지수를 피하지 않는다. 커다란 눈이 물기로 번들거린다. 원우의 앞에 서 그 축축한 눈을 부라렸다.
"너..." "걔는 알아서 다른 곳에 잘 보냈어요. 박서진은 절대 못 찾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왜, 네가..." "그리고 박서진 죽이는 건 내가 해요." "뭐?" "가이드가 없어도 센티넬은 센티넬이잖아. 위험해요." "네가 씨발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니가 뭔데!"
화가 난 건지 숨이 턱 끝까지 와 있다. 갑자기 험한 욕이 튀어나오며 말이 툭툭 끊긴다. 감정이 격해지면 영어를 쓰는구나 생각하면서도 시뻘게진 눈가가 안쓰럽다. 원우는 지수의 볼을 굴러갈 눈물을 닦아내고 싶어졌다. 하지만 다정하게 굴기에는 아직 해결할 감정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언제든 그쪽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죠." "이 복수는 내 복수라고 했어. 간섭하면 죽여버릴 거야."
갈가리 찢긴 목소리와 함께 까칠한 악도 후두둑 떨어졌다. 너한테 들키면 안 됐어. 내가 바보였어. 센티넬을 믿은 내 잘못이지.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는 영어는 악을 눌러 삼키는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숨이 모자라 말을 멈춘다. 원우의 귀가 뜨거워진다. 하얀 이가 입술을 짓누르고 잇새로 신경질적인 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뜨거운 눈가를 식혀주려는 원우의 손길을 쳐내곤 눈을 가렸다. 그대로 잠깐 눈을 덮고 심호흡을 한다. 울분이 느껴지는 숨이 원우와 지수의 사이를 벌려 놓는다.
"네가 날 통제할 수 있다고? 웃기지 마. 넌 절대 못 그래."
꾹꾹 내뱉는 말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웠지만 벌겋게 변한 눈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울음과 부아가 가득 찬 얼굴이 파르르 떨린다. 자잘한 근육이 경련하며 표정을 바꾼다. 새파란 웃음이다.
"날 사랑하잖아."
6 펑, 폭발음과 함께 원우의 시야로 매캐한 연기가 들어찼다. 손짓 한 번으로 부서지는 것들을 바라보다 보면 또렷한 허망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너져내리는 벽에 시선을 고정한 원우는 텅 비어버린 머릿속을 애써 채워 넣는다. 지수와 연관 없는 무언가를 생각하려 애쓸수록 더더욱 지수로 들이차는 회로가 원망스러웠다. 제 일을 해결하고서야 터벅터벅 걸어온 순영이 원우의 어깨를 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가자, 순영의 뒤를 따라 들어선 거리엔 먼지가 자욱하다. 종종 적대적인 눈빛을 띤 사람들이 원우와 순영을 지나쳤다. 순영은 머쓱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리지만 변명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헛헛한 웃음이 튀어나온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자 순영이 뒤를 돌아봤다.
"오늘 아침에 수치 몇이었냐, 너." "...칠십?" "접촉은 잘 하나 보네. 안색이 형 없을 때보다 구려서 팔백 쯤 될 줄 알았는데."
구리긴, 또 실없는 웃음을 토하지만 끝 맛이 텁텁한 건 숨길 수 없다. 순영의 까만 뒤통수를 쳐다보며 느려지는 발걸음을 애써 재촉한다. 싸웠냐? 뻔한 질문을 듣자 입이 썼다. 싸우긴, 그냥 좀 피곤해서 그렇지. 건조하게 대답한다. 흐음, 애매한 반응을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는다. 조용히 걷는 순영에 원우는 다시 끈적한 생각의 미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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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지수의 손안에서 유순하게 굴러갔다. 박서진은 가이드가 사라진 뒤 한 달 내내 센터 내에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자신에게 맞는 가이드를 찾는 데에도 실패한 듯했다. 몰래 병원에 틀어박혀 목숨만 부지하고 있겠지. 자신이 학대한 어린 가이드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을 테니. 그 정도는 지수의 언급 없이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지수는 종종 원우의 방으로 찾아왔다. 원우가 조금 어지럽다고, 위험하다고 느낄 때쯤 나타나 조용히 몸을 섞고 다시 돌아갔다. 지수가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돌아가면 원우는 시꺼먼 늪 속으로 발을 디뎠다. 심연의 늪은 우울한 원우를 잘만 받아주었다.
마찰음과 간헐적으로 퍼지는 숨소리만이 방을 채웠다. 지수는 까슬한 셔츠가 쓸려올려가는 불편함을 무시하며 침대 옆 단정한 탁상 등에 눈길을 줬다. 종종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는 것 말고는 늘어진 인형 같았다. 착실히 자신을 무시하는 지수에 원우는 가라앉는 기분으로 움직였다. 의식적인 허릿짓에도 사정감은 몰려왔다. 지수도 끝이 다가오는지 시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곧은 쇄골에 코를 묻고 사정했다. 옅은 바디워시향이 났다. 성기를 빼고 지수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일어나려는 듯한 몸짓에도 원우는 지수를 가둔 몸을 치우지 않는다. 고개를 더 깊게 묻었다. 바디워시향과 지수의 체향이 동시에 밀려온다. 날카롭지만 어쩐지 아늑한, 따뜻한 향. 원우가 이를 악물었다. 지수는 가만히 천장을 본다. 습관이 된 체념은 다정함은 배제한 채 다가왔다. 눈을 도르르 굴리다 고개 숙인 원우의 귀를 봤다. 동그란 귓바퀴가 온통 붉다. 흐, 짓씹힌 소리가 작게 터졌다. 동시에 지수의 쇄골로 눈물이 떨어진다. 툭, 투둑, 불규칙적으로 곤두박질치는 방울은 소리도 없다.
"...울어?"
놀란 목소리가 엇나간다. 원우야, 울어? 다정해진 울음에 원우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도 벌겋게 익어 차가운 인상이 한순간에 안쓰러워졌다. 눈을 깜빡이자 지수의 볼이 원우가 떨군 눈물로 젖었다. 팔을 들어 처연해진 얼굴을 손으로 더듬는다. 그 손길을 걷어낼 생각도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지수를 흐릿하게 내려다봤다. 신기한 것을 보는 눈빛. 몽롱한 웃음이 살금 퍼진다.
"진짜 우네."
웃음기 섞인 말에 의식이 돌아왔다. 얇은 손목을 잡아 끌어내리곤 겹쳐진 몸을 뗀다. 지수도 누워있는 상태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밀려난 이불을 부스럭 거리며 그러모았다. 무릎을 세워 턱을 기댄 자세로 원우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얼굴에 흥미로움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원우야." "...네." "나 때문에 운 사람." "..." "네가 처음이야." "웃기지 마요." "진짜래두." "웃지도 말고." "원우야." "왜요." "난 널 죽일 거야." "허-."
방긋방긋 실없이 말하는 지수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벨트를 찬다. 왜 운 거야, 진짜.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힘들어하고 있었나 보다. 자꾸만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 말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눈도 말도 피하는 지수는 무서웠다. 영영 봐주지 않을 것 같아 무섭고 외로웠다. 눈물의 이유를 깨닫자 붉은 얼굴이 더 뜨거워졌다. 아는지 모르는지 지수는 고개까지 흔들거리며 말을 잇는다.
"너한테 화났었는데 다 풀려버렸어." "...그건 다행이네요." "응, 그래도 박서진은 내가 죽일 거야."
다 쓴 콘돔을 처리하는 손이 잠깐 멈칫한다. 대답이 없는 원우에 지수가 미소를 지었다.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소리 내어 웃자 약하게 심통이 난 얼굴로 지수를 돌아본다. 흐응, 장난스러운 비음이 흘러나온다. 너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해사한 표정에 원우는 또 눈을 피했다.
"그러니까, 죽일 때 옆에 있어 주라." "네?" "너라면 옆에 있어도 좋을 것 같아서. 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하는 복수, 로맨틱하잖아."
살포시 휘어지는 눈이 원우를 향하자 머리가 어질하다. 가디건을 다시 걸고 침대로 다가갔다. 올려다보는 지수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꾸욱 도장을 찍 듯 다른 움직임 없이 입술만 맞댄다. 꺼슬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겨울을 말한다. 천천히 얼굴을 떼자 웃음기 맺힌 낯이 더 활짝 펴졌다. 허리를 펴는 원우의 볼을 잡고 다시 짧게 키스한다. 감은 눈으로 지수의 입술을 받은 원우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키스할 때 눈 감는 거 처음 봐, 중얼거리자 원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가 시작한 키스가 처음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입천장을 간질인다.
"박서진은 언제 돌아올까." "24일, 크리스마스 축하연엔 참석해야지. 약을 먹든지 해서라도." "언제, 갈까요." "이브 밤, 파티 도중이겠지?"
작년 크리스마스 파티를 떠올려본다. 커스터드푸딩이 참 맛있었는데. 지수가 좋아할 것 같은 맛이었다. 또 어땠더라, 시끄럽게 떠드는 순영의 옆에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다가 약발이 떨어져 가만히 푸딩이나 주워 먹은 기억밖에 없다. 푸딩 말이지.... 어느새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아있다. 어깨에는 지수가 머리를 기댔고, 창문을 내다보니 눈이 오는 것 같다. 하얀 불빛이 덩어리진 어둠을 갉아먹는다. 잠에 빠져 떨어지는 고개를 원우의 손이 고정시켰다.
"사랑해요."
입술이 바싹 말라버렸다. 감은 눈을 덮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듯하더니 이내 고요해진다.
"날 사랑해요?"
돌아오지 않는 대답.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대답. 원우는 다시 창밖을 봤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7 윤이 흐르는 더비 슈즈가 복도를 울리며 걸었다. 여덟시에 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오랜만에 찬 금색 시계의 긴 팔은 원을 반으로 쪼개 넘어가고 있다. 설마, 설마... 걸음이 빨라지고 규칙적인 소리의 사이가 좁아진다. 원우는 검은 자켓이 휘날리도록 다리를 움직였다.
"홍지수!"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열리는 문을 젖혀버린다. 지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자 원우는 뒤를 돌아 다시 발을 뗐다. 어디로 갔을까, 벌써 박서진한테... 밭은 숨을 쉬며 생각을 이어나가려는 원우를 바닥을 기는 목소리가 붙잡았다. 나 여기 있어, 나지막하다 못해 사라질 것만 같다. 화장실 바닥은 온통 피바다였다. 홍지수의 피, 그때 완 달랐다. 지수는 자신의 피 위에 지친 듯이 누워있었다. 입가가 젖어있었다. 나른하게 접힌 눈이 하얀 천장을 비추다 원우의 놀란 얼굴을 담았다. 또, 웃었다. 시도 때도 없이 피어나는 미소에 원우는 왠지 모르게 화가 나곤 했다. 늘 무언갈 가리는 미소였으니까.
"뭐가 좋다고 계속 웃어." "옷 예쁘게 입었네." "빨리 일어나서 옷 갈아입어요." "잠깐만, 나 아퍼." "왜 이런 거야, 언제부터 이랬어요." "야아, 아픈 건 난데 왜 네가 더 죽을 상이야." "형이 죽으면 나도 죽잖아."
피 묻은 얼굴로 키득키득 웃었다. 원우야, 어떡하지.
"난 너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지수는 엘에이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했다. 목적을 위해 변하고 희생하고 망가지는 사람들. 그중에는 가이드가 되려는 부류도 있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몸이 망치는 과정이었다. 지수는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가이드가 된 친구를 보며 찌푸린 웃음을 지었다. 그 친구는 동생을 지키기 위해 가이드가 되려 했다. 한심했다. 내가 가이드가 된다면 그것은 온전히 내 복수를 위해서겠지,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었다. 지수가 맞춰야 할 센티넬은 S급이었다. 공명이 넓을수록 가이드가 되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강한 사람을 형 편으로 만들 수 있고, 그러다 사랑하게 되면 좋은 거죠, 뭐. 동그란 안경을 추켜 올리며 조언하는 지훈에게 지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가올 고통이 무서운 것보다 누군가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 싫었다. 원하지 않는 상대와 의무적인 닿음을 이루는 것도 싫었다. 최악은 내 복수가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 지수는 벽을 치는 법을 배웠다. 사랑받는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원우는 날 사랑하니까 걔의 관여도 결국 내 것이잖아. 서투른 합리화는 다정해진 원우의 눈빛으로 채워진다. 날 사랑해요? 귀에서 맴도는 낮은 목소리에 지수는 마음속으로 마저 끝끝내 답하지 못 했다. 널 사랑하는 걸까, 보다 내가 널 사랑해도 될까. 나는 널 죽일 건데. 널 죽이고 나도 죽을 텐데.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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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지수는 낯빛이 어두워진 것 말고는 멀쩡했다. 멀쩡해 보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반질한 외모 안으로 썩어있을 상태를 원우는 차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피 묻은 옷을 물에 담가놓는 게 손에 익어 보여 더 입이 썼다. 연회장으로 바로 가야겠다.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새 셔츠를 찾는 지수의 맨몸은 마르고 얼룩지다.
"너는 피 안 묻었어? 셔츠 확인해 봐." "...괜찮아요. 얼른 옷 입어요." "응. 기다리게 해서 미안."
어차피 또 묻을 텐데. 배 쪽을 물들인 핏자국을 대충 가리고 대답했다. 한참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더니 단정한 정장에 보타이까지 하고 나타난다. 타단- 다분히 미국인스러운 추임새까지 넣으며 문 앞에 선 원우의 팔에 손을 올렸다. 에스코트~, 완벽한 발음으로 던지는 어이없는 말에 원우도 웃음이 터졌다.
"가시죠."
어느 때보다 발랄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둘은 걸어나갔다. 비록 지수의 자켓 품 속엔 새까만 베레타 하나가 숨겨져있고, 원우의 셔츠엔 더 퍼져갈 새빨간 피가 묻어있지만, 충분하게 완벽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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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에선 우아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소지품을 검사하겠다는 가드를 가볍게 쓰러트렸다. 둘의 길을 저지하는 사람들을 터트려 폭죽으로 썼다. 죽어가는 양복들 사이에서 걸음걸이는 여전히 경쾌했고 표정은 예수의 탄신을 기뻐하는 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종종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부드러운 호선을 마주하면 다시 앞을 봤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원우가 먼저 입을 맞췄다.
"크리스마스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 "바다는 어때요. 바다 보고 싶다면서."
좋지. 지저분해진 복도 벽을 응시하는 지수의 머리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켠다. 몇 걸음 더 다가가 화려하게 장식된 연회장 문을 열었다. 별을 잘게 조각 내 뿌려놓은 것처럼 온통 눈부셨다. 별보다는, 음, 다이아몬드에 가깝다. 화려하고 극적이고 어느 정도 인위적인 게. 복수의 클라이맥스에 딱 어울린다. 둘에게는 망설임도 거칠 것도 없었다. 번쩍이는 바닥을 레드 카펫처럼 밟으며 쏟아질 것 같은 샹들리에 아래에 섰다. 연회장의 한가운데서 등을 맞대고 선다. 지수가 새끈하게 윤을 낸 베레타를 꺼냄과 동시에 원우가 눈을 감고 팔을 펼쳤다. 거대한 성벽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바닥을 빈틈없이 채운 형형색색의 파편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쓰러져 있었다. 알았다, 이건 우리의 복수다. 원우의 힘을 확인한 순간 지수는 또다시 체념했다. 그 말이 맞았다. 포기하는 것이 습관이 될 거라고. 지수는 자신을 보는 눈을 피하곤 우뚝 솟아있는 훤칠한 얼굴에게 다가갔다. 영웅을 사칭하다 보니 퍽 위풍당당해진 모습으로 서있다.
"내가 목표 군. 가이드를 죽인 것도-"
망설임 없이 날아간 총알은 허벅지에 꽂혔다. 묵직한 신음을 뱉으며 쓰러지지만 지수의 총구는 여전히 하나의 인영만을 향한다. 탕-, 이번엔 허벅지를 붙잡은 팔뚝. 처절한 비명은 지수의 손을 내리지 못 했다. 웅크린 몸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춘 지수가 박서진의 귓가에 다가간다. 나긋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원우의 귓가에 닿지 못하고, 박서진은 그렇게 굳센 인간이 아니었다. 감사, 짧은 인사는 원우에게 도달할 만큼 컸다. 원우가 뒤를 돌아보자 박서진의 자켓을 뒤지는 지수가 보였다. 곧 묵직해 보이는 무언가를 흔들며 몸을 일으킨다.
"줬으니까, 이제 살려-"
탕, 이번엔 길지도 않은 총성이었다. 빠르게 심장을 뚫는 소리에 지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발을 돌려 원우에게 돌아온 지수가 원우의 뺨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입술을 뗄 때마다 한마디씩 건네는 통에 넋 놓고 지수의 얼굴만 봤다. 멀어지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일그러지는 표정도 그래서 볼 수 있었다. 어딘가 다급하고, 처연하고, 미안해 보였다. 뭔가 있구나. 떨어진 사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다가오는 지수의 어깨를 붙잡는다.
"하고 싶은 말, 있지." "...." "뭐예요." "저번에 말했어. 너는 제대로 안 들었겠지만." "...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널 죽일 거야."
지수가 속해 있던 곳, 센티넬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지수의 복수를 도와주던 곳의 궁극적인 목표는 센티넬의 몰살이었다. 지수 역시 한국 센티넬의 멸살을 담보로 복수를 위한 지원을 받았다. 한국은 한 번에 죽이기가 쉬울 거야. 형이 죽이려는 사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스위치만 구해서... 지훈의 설명을 들을 때만 해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수 역시 센티넬이 죽을 만큼 싫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센티넬이었으니까. 원우의 혼란스러운 눈빛 따위 예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게 내 복수의 완성이야." "...근데 그걸 왜 말해줘. 그냥 죽이지." "네가 막아달라고."
날, 죽여달라고. 지수는 여느 때처럼 웃으면서 얘기했다. 마치 그래, 바다에 가자.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복수의 매듭을 이런 식으로 짓고 싶지 않은데, 끝을 보지 않고는 죽을 수도 없거든. 날 사랑하는 네 손에 죽으면 끝없이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였다. 뱃속부터 차오르는 걸쭉한 핏기에 새벽에 눈을 뜨면 늘 잠든 원우를 바라봤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다 잠에 축 늘어진 하얀 손을 들어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술을 비볐다. 이 손에 죽어야겠다. 이 손으로 다른 사람의 숨을 끊는 건.... 지수가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분명 지수는 누구의 손에든 목이 졸릴 것이었고, 더 신빙성 있지만 끔찍한 경우는 원우가 지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싫어, 차라리 네가 날 죽여줘.
"이러려고 날 데려왔어요? 자기 편하게 죽여달라고?"
지수는 원우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먹먹하게 말을 이었다. 이걸 누르면 센터에 속한 센티넬은 다 죽어. 여기, 붉은 숫자가 차오르고 터져버려. 이걸 내가 누르지 못하게 죽이는 거지.
"그럼 너는 영웅이 될 테니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다른 가이드는 금방 구해질 거야. 어차피 난 인공적인 가이드였고, 대체품에, 오래가지도 못 했을 테니까." "사랑해요. 처음이에요. 다른 가이드는 사랑하지 못할 거야. 형은 대체품이 아니에요." "원우야, 그게 사랑인 것 같니?"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떨어졌다. 사랑이 아니야, 작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지수는 괜히 숨을 벌린다.
"유대라는 게 말이야, 생각보다 아늑해서 자꾸만 의지하게 만들지. 그 관계에 집착하게 되면서 다들 착각해, 사랑이라고. 특히나 너 같은 외로운 아이는..."
지수는 '외로운'을 유독 서글프게 발음했다. 원우의 차가운 볼을 더듬으며, 마지막 음을 가파르게 내렸다. 눈썹을 축 늘어뜨린 지수는 안쓰러운 미소를 짓는다. 얼굴이 일그러질 것 같아 금새 고개를 숙였다. 사랑이 아닐리가 있겠는가. 지수는 위선적인 자신의 말에 스스로도 코웃음을 쳤다. 전원우만큼 곧은 사랑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런 사랑을 받은 적도 없었다. 때때로 전해져 오는 감정은 지수에게 벅찰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 단순하고도 복잡한, 그리고 우습도록 의미없는 소모에 지수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샹들리에는 빛나고 있었고, 오래된 재즈 음악 역시 끊기지 않았다. 쓰러진 이들은 더미를 이루어 한 발만 움직여도 금새 발에 치일 정도 였다. 형형색색의 쓰레기에 둘러싸인 듯 하다. 원우는 달콤쌉싸름한 표정의 지수를 마주하고 있다.
왜 매번 웃어요. 나는 형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데.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이 뜨거워지고. 나도 축축한 눈물로 젖은 볼을 감싸고 싶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편안함이 아닌 어딘가 불편한 사랑을 지탱하기 때문에. 처음이지만 알 수 있어. 이건 사랑이에요. 가느다란 미동도 없는 눈빛을 원우는 지수에게 보낸다. 지수는 원우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다. 투명한 광이 부딪히는 바닥에 눈을 꽂고 다시 말했다.
"나는 첫사랑이 아니야, 그냥 첫사람이이야."
완전하게 부정당한 사랑은 갈피를 잃고 터져나온다. 원우는 말을 잃고 지수는 증오를 얻는다. 배신감, 억울함, 슬픔, 탈력감... 순식간에 지수에게 파도처럼 넘어온다. 날카로운 감정이 쏟아지는 동안 원우는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지수의 손에 들어간 검은 스위치를 뺏어들고 망설임없이 버튼을 눌러버린 것이다. 지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면면히 이어지는 파도가 이루는 바다, 그 거대한 몸체에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토록 넓고 깊은 바다, 우리가 익사할 만큼 깊은 바다. 까마득한 사랑의 조각이 감정이 되어 몰려온다. 밀물처럼 쓸려온 조각은 짠맛을 간직한 채 지수의 바닷가로 향했다. 이 모든 증오 역시 사랑의 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갈라진 슬픔을 적시고 만다. 복수의 환희는 손끝으로 삼켜진지 오래였다.
원우의 해피엔딩은 반쯤 이루어졌다. 마주하는 얼굴이 소금기 가득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붉은 수치가 새겨진 피부 아래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심장은 말 그대로 '터질듯이' 뛰며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홀 안이 옅은 열기로 휩싸인다. 원우는 입을 꾹 다물고 지수의 눈물을 들여다봤다. 헐떡이는 울음 소리에 코 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외면한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요." "...그럴 수가 없어."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말아요." "...원우야."
바다에 잠긴 얼굴이 다가온다. 원우야, 원우야- 훌쩍이는 소리 하나 없이 눈물만 죽죽 흘렸다. 열화를 두른 듯한 원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면서도 그랬다. 뒤집히는 심장이 판판한 가슴팍과 마주한다. 커다란 울림에 지수는 이제 소리내어 울었다. 이러지 마요, 지수의 팔을 뜯어내려는 손길이 급박하다.
"복수 성공했잖아. 이제 살아야지." "네가 성공 시켜 줬잖아. 이제 죽어도 되지."
원우의 마른 등을 쓸며 대꾸한다. 휘어진 눈은 웃음과 닮았지만 단단한 슬픔을 울컥 뱉어냈다. 지수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줬다. 열기에 어질해진 원우를 버텨낸다. 열두 시 종이 울리고 첫 폭발음이 들렸다. 팡, 퍼벙, 퍽, 새빨간 피가 튀고 재즈 위로 쌓이는 복수와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낭만적일 수도 있었다. 까슬한 입술이 닿는다. 지수도 원우도 웃었다. 느린 조수와 함께 꾸역꾸역 웃었다. 원우야- 수백번은 부른 이름이 유독 짭쪼름하다.
"사랑해"
돌아오지 않는 대답.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대답. 지수는 뜨겁게 녹아 맞붙는 심장을 확신한다. 말도 안되게 깊은 이 감정을 외면하지 못하고 빠져버린 것은 지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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