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네온으로 장식된 벽을 응시하던 순영이 포크를 내려놓는 조슈아의 움직임에 몸을 굳혔다. 연속적이던 돌발 행동에 음식을 먹는 내내 잔뜩 긴장해 있었지만 지수는 얌전히 볼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긴장한거야?"

"네?"

"나 아무짓도 안 해. 편하게 먹어."


내리깐 눈으로 샐러드를 뒤적거리는 얼굴이 핑크빛 조명을 맞아 상기되어 보였다. 순영은 그제서야 서툴게 고기를 썰기 시작한다. 한 번 고급스러운 음식이 들어간 배는 속을 조이며 더 많은 걸 원했다. 눈치를 보자 조슈아가 눈을 깜박이다 웨이터를 부른다. 뭐 더 먹을래?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순영이 홀린듯 메뉴판을 읽었다. 거지근성, 이성이 씨부리는 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자 마음이 편해진다. 


"조슈아는 더 안 먹어요?"

"난 배불러. 너 편하게 먹어. 데이트 신청한 쪽이 내야지."


 켁, 데이트 소리에 순영의 목이 꾹 막혔다. 이런 레스토랑에서 메뉴 여덟개는 껌이고, 기사가 있는 버스만한 자가용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지금 나랑 데이트를 하-고 있다 믿-는게... 정상적이지는 않으니까. 현실적인 생각에 빠지는 것은 어느정도 고질적인 습관이었다. 순영아, 순영의 얼굴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 지수가 말을 걸기까지 순영은 칙칙한 자신과 자몽빛 머리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지수는 순영의 대답을 기다리며 로제 파스타 접시에서 통통한 새우를 뽑아 먹는다. 


"...네?"


한참이 늦은 대답에 눈이 접혔다. 사르르 휘어지는 눈꼬리에 순영의 마른침이 삼켜진다. 


"나, 오늘 하루만 재워주라."




회색구역은 가로등 불빛도 칙칙했다. 지수는 순영의 뒤에서 헉헉대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 오르막길은 매일 전용이란 이름의 교통수단들을 거느리는 지수에겐 가혹했다. 모래주머니를 단 다리 대신 얻을 수 있는 것은 순영의 팔뚝 감촉과, 약간 땀에 젖은 옆태. 흐응, 가쁜 숨을 쉬는 와중에도 기분좋은 콧소리가 흘러나온다. 


"많이 힘들어요? 그러니까 집은 좀..."

"아니?! 나 괜찮은, 후하! 괜찮아!"

"업힐래요?"


응!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던 지수가 갑자기 몸을 꼿꼿이 세운다. 속으로는 오백번도 더 지시했을 일이지만 결국 온몸의 외침을 묵살하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명백하게 인위적인 미소에 신경쓰이지 않는게 이상했다. 결국 지수의 얼굴은 불긋하게 익어 순영의 어깨에 놓였다. 달랑이는 고급 로퍼에 순영의 표정이 묘해진다. 



 지수가 앉아있는 낡은 침대에선 텁텁한 냄새가 나고 천장엔 거뭇한 얼룩이 있다.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좁은 집은 전체적으로도 세부적으로도 엄청 퀴퀴했다. 지수의 침대에서 나던 향기를 떠올린 순영이 제풀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말리는 지수는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이리 와 봐. 내가 머리 말려줄게."


보슬보슬해진 머리가 흩날리고 지수가 활짝 웃었다. 순영은 잘 쓰지도 않는 오래된 드라이기를 어디선가 찾은 모양이다. 머쓱하게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침대 아래 풀썩 주저앉았다. 지수의 다리 하나가 내려오고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 사이로 파고든다. 


"찬물로 샤워했어? 따뜻한 물 나오던데?"

"아, 몸에 열이 많아서..."

"혼자 사나 봐?"

"네, 조슈아는요?"

"나는, 많이... 근데 혼자 사는 것 같아. 다 고용인이라. 오늘 저녁은 어땠어?"


 난방비 아껴야 하니까요, 고아에요 같은 궁상맞은 대답은 삼키는게 좋다. 우와앙- 요란한 드라이기 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지수의 질문에 대답하며 순영은 어느정도 지수를 대하는 노하우를 쌓아갔다. 

 질문 공세가 끝났는지 바람의 소음 사이로 지수의 콧노래가 섞인다. 너무 긴 하루였다. 순영은 서서히 눈이 감겼다.



 동 트기 전 그 어두운 푸름의 순간. 잠에서 깬 순영은 꿈을 꿨다. 차가운 창 너머의 풍경에 찍은 부드러운 분홍색 점은 순영의 꿈이었다. 나른한 이성은 순영을 벌써 밖으로 나가 그 풍경에 끼어들게 만들었다.

 이곳저곳 잔뜩 패여버린 벤치에 앉은 지수는 낯선 눈을 하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색을 띄고 있는 뉴타운을 바라보는 시선. 지수와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시선. 순영은 지수에게 느낀 적 없는 서늘함에 이것이 꿈이라 확신했다. 꿈, 사랑, 쓸데없는 용기를 주는 것들이 모두 만났으니.

 순영의 인기척에 지수는 느리게 뒤를 돌아본다. 냉한 얼굴을 벗고 다시금 따스한 웃음. 순영은 몽롱한 상태로 지수의 곁에 앉았다. 식어버린 손을 맞잡는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다. 


"알죠. 우리 하나도 안 어울리는 거. 척 봐도 뉴타운 상위 몇프로에서 노는 조슈아랑, 회색 구역에서 빌빌대는 나랑. 딱 만났을 때, 돈 받고 자는 그런 관계가 우리한테 딱 맞았을지도 몰라요."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어설픈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매끄럽게 말을 잇는 순영의 표정은 덤덤했다. 새벽에 걸맞는 분위기에 지수도 묵묵히 매끈한 옆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조슈아도 알고, 나는 더 잘 아는데. 조슈아가 자꾸 그걸 모르는 것 처럼 구니까 나도 잊어버려요. 둘만 있으면 더 좋아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아질 수 있을 것 같다니?"

"나랑 한번 더 자려고 찾아왔어요?"

"그것도 있는데-"


 지수가 시선을 발끝으로 처박았다. 외면당한 뉴타운을 지켜보는 것은 이제 순영 뿐이었다. 


"그냥 네가 보고 싶었어."




 두번째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온 몸을 둘둘 감싼 이불이었다. 여기저기 튿어진 오래된 이불은 회색구역의 탁한 바람에서 순영을 지키는 중이었다. 벤치에 길게 누운채로 순영은 흐릿한 꿈을 더듬었다. 찬 공기가 순영의 청회색 머리를 훑고 지나간다. 

 꿈이었다. 사랑이었을까. 순영은 슬리퍼를 찾아 신으며 눈을 끔뻑였다. 어디에도 지수의 흔적은 없다.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 하룻밤만에 사라져버린 지수에 순영은 허탈함 섞인 슬픔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불을 들쳐매고 또 나갈 준비를 한다. 뉴타운의 달콤하게 칠해진 벽을 지난다.  


 어딘가 한 귀퉁이를 지수의 곁에 끼워놓는 바람에 순영은 바쁜 하루하루에도 멍한 얼굴을 유지했다. 눈을 뜨면 익숙하게 점퍼에 팔을 끼우고 미간을 주무르며 가게로 나갔다. 

 스웨터를 걸치곤 진열대로 향하는 순영을 로지부인은 퍽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연분홍 연기를 뻐끔뻐끔 뱉는 파이프를 내려놓고 순영의 옆에 섰다. 그리고 건넨 질문에 순영은 그동안 놓고 있던 정신을 붙잡았다. 


"오늘은 어느 집이니?"


 오늘은 장미일이다. 즉, 순영의 이웃 혹은 이웃의 이웃 어쩌면 이웃의 이웃의 이웃 정도는 박살난 집을 보며 한숨을 뱉어야 하는 날이란 말이다. 순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지수가 떠난 삼주, 순영이 넋을 놓았던 삼주 간 어떠한 비명도 울음도 전해지는 한숨의 울림도 없었다. 아, 쇼산나가 하던 말이 그거였나. 멍하니 흘려보냈던 '요즘 이상해'로 시작한 말의 파편이 떠올랐다. 요란한 광고만 띄우는 전광판들을 지나간 걸음걸이의 기억도 살아났다. 


"오늘은, 아무것도요."


 그래서 뭐,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우연. 입안을 맴도는 단어를 곱씹으며 순영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 낀 곰팡이가 밤하늘처럼 새카맣다. 잊자, 잊어. 웃지 못할 사랑의 잔상에 허우적대는 꼴은 웃기지도 않다. 그럼에도 머리를 앞지르는 마음은 또 비죽비죽 지수를 생각한다. 생기발랄한 자몽색과 어두운 색의 집을 생각한다.

 가난은 모든 우선순위를 짓밟고, 사람을 생에 묶어놓는다. 여타 아름다운 것들을 제쳐놓은 그저 온전하기를 바라는 안쓰러운 생에. 순영은 더 바쁜 하루하루를 영위했다. 생각할 틈도 없는 하루의 틈틈이 울먹거렸다. 금이 가고 있는 것이다. 불만없이 회색을 상속받은 가면이 갈라지고 향긋한 분홍을 가로막는 가난에 주먹질을 하고 있다. 순영은 원망했다. 사라진 지수보다는, 얼룩덜룩한 회색 구역 속 조그맣고 지저분한 집 한채를. 그럼에도 순영은 말없이 칙칙한 집 속으로 몸을 담군다. 조용한 습관을 지속한다. 금이 간 벽을 묵묵히 붙이는 것은 순영에게 어렵지 않았다. 나도 네가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저 그런 거였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 괴로워 순영은 이불을 질질 끌어 밖으로 나섰다. 그때 그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 눈을 끔뻑인다. 밤공기가 볼에 입을 맞추고 가자 졸음이 몰려들었다. 


 차가워진 볼을 감싸는 감촉에 닫힌 눈꺼풀이 공기를 받았다. 눈 앞에서 헤헤 웃는 얼굴이 헬쓱해보여 순영도 지수의 볼을 쓸었다. 몸을 일으켜 앉으려는 순영의 어깨를 붙잡고 지수는 먼저 입을 맞춘다. 몇 번의 다정한 마찰은 순영의 잠을 완전히 깨웠다. 입술이 떨어지자 순영은 급하게 몸을 일으킨다.


"왜-"


 채 말의 형태를 띄기도 전에 손을 들었다. 입술을 누르는 기다란 손가락에 순영의 눈이 동그래진다. 한 번 사르르 웃은 얼굴은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 순영은 얼떨떨하게 이불을 나누어 덮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아, 순영은 턱 막혀버린 속에 차마 대답을 끄집어내지 못했다. 지수의 시선을 따라간 뉴타운, 뉴타운을 감싸고 있는 회색구역. 아니, 더 이상 회색구역이라 부를 수 없었다. 터오는 동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집들은 온통 새파랗게, 맑은 하늘에 담군 것 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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