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색 점퍼를 걸치는 급박한 손길.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구겨신고 순영은 문을 박찬다. 망할, 망할 놈들. 내내 삭지않는 분을 짓이기며 돌조각을 걷어차자 덜컹덜컹 구르는 꼴이 순영의 기분같다. 구불대는 내리막, 아찔하게 타고 내려가는 급한 경사. 돌멩이를 따라 걸음을 서두르자 어느새 칙칙한 벽은 부드러운 연어색이다. 시야가 불그스름해지면 순영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맺힌다. 오웰의 저주를 거부하는 몸부림. 그럼에도 순영은 여전한 헉슬리의 입김을 안다. 아, 헤밍웨이. 한숨처럼 외치는 입술이 삐뚤다. 쓰라린 손바닥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마지막 내리막을 벗어났다.
어지러울 정도로 화사한 장밋빛 도시, 뉴타운. 각기 다른 분홍색을 뽐내는 건물들이 한결같은 햇살을 받으며 콧대를 세운다. 어둠과 가난을 쓸어버리고 세운 발그레한 꽃밭은 향기는 없지만 한없이 정갈하다. 한없이 파란 하늘은 정확히 매 수요일 일곱시부터 비를 쏟고, 격주 토요일에 하얀 눈꽃을 뱉는다. 뜨겁지 않은 햇살, 랜덤으로 나열되는 구름들과 그 사이를 나비처럼 맴도는 풍선 혹은 꽃잎들. 거리에는 규칙적으로 늘어진 메타세콰이아와 붉은 튤립이 삶의 질을 드높인다. 뉴타운의 주민들은 매일 아침 같은 해를 바라보며 외쳤다. 찬란해라, 뉴타운 천국!
반짝이는 것은 모두
이 찬란한 도시에서 칙칙한 건 순영 뿐이었다. 푸슬푸슬한 청회색 머리, 쥐색 점퍼와 검은 진, 그나마 밝은 흰 스니커즈는 때가 잔뜩 끼어있다. 좋지않은 눈길이 느껴지지만 순영은 개의치 않는다. 사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다. 불만스러운 얼굴이 성큼성큼 거리를 가로지른다.
순영은 일주일 중 오늘, 그러니까 장미일을 가장 싫어한다. 언젠가의 사람들은 월요일이라 불렸던 한 주의 첫 날. 이름이 바뀐 것도 누군가 순영처럼 이 날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순영이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색색깔의 장미를 꽂고 있다. 커다란 전광판은 외친다. '모두가 행복한 장미일!' 번쩍이는 버블껌 색의 글씨가 순영을 바닥에 처박는다. 건너편 전광판엔 '서로에게 사랑을 선물해요' 저것 때문이다. 저 생각없는 슬로건은 순영의 몸을 녹초로 만든다.
뉴타운 제 2구역과 제 4구역 사이, 정식 명칭을 따르자면 레드산드라와 데플다운이 맞닿는 거리에 순영의 일터가 있다. 적갈색 나무에 하얀 페인트를 칠한 '로지 핑크의 초콜릿 가게'는 뉴타운에서 유일하게 순영을 받아 준 가게였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장 로지씨 부부는 순영을 퍽 마음에 들어했다. 그 이유는 순영조차 알 수 없지만 굳이 그에 대해 캐묻진 않는다. 어렵게 얻은 직장을 놓치고 싶지 않으므로….
여튼, 장미일에 서로에게 건네는 선물은 뉴타운에선 오래된 풍습이자 영원한 유행이다. 덕분에 장미일이면 연분홍 장미를 가슴에 꽂은 여자가 점잖게 포장된 초콜릿을 사가고 열 살 남짓의 동그란 볼의 남자아이도 초코바에 빨간 리본을 부탁한다. 저녁 쯤이면 상기된 사람들이 가게를 가득 채우는데, 순영이 가장 싫어하는 날의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다. 모두가 행복한 가운데 덮쳐오는 우울함은 다른 때보다 배로 역겹다.
평소라면 이정도로 순영의 거지같은 기분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이는 빨간 피가 몽글몽글 새어나오는 손바닥과 관련이 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새벽 사이 사라져버린 순영의 집 동쪽 벽과.
말했듯이 뉴타운은 어둠과 가난을 쓸어버리고 세운 도시다. 그 화려한 핑크들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뉴타운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세 달 전, 뉴타운의 모든 전광판이 같은 글씨를 띄웠다. 강렬한 마젠타 색과 번뜩이는 굵은 광채가 온 눈을 사로잡았다.
홀리데이 프로젝트!
뉴타운 외곽의 회색구역을 물들이는 대국적 프로젝트. 오래전부터 뉴타운은 회색구역의 거주민들에게 집을 바꿀 것을 제안해왔다. 오래된 집을 부술 수 있게만 한다면, 새로운 붉은 집을 지어주겠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다만, 그 완성된 집을 무료로 넘길 정도로 자비롭진 않았고 더욱이 회색구역의 사람들은 화려한 핑크 하우스를 구입할 정도로 넉넉하지 않았다. 그럴 돈이 있었다면 애초에 뉴타운 내부로 이주를 했겠지.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꿉꿉한 곳에 몸을 비집고 있는덴 거창한 이유가 있는게 아니다. 홀리데이 프로젝트는 이러한 이유로 뉴타운의 제안을 거절한 회색구역을 파괴하는 중이다.
일요일에서 장미일로 넘어가는 새벽, 회색구역의 집 중 20가구가 부서진다. 지붕이 날아가거나, 집의 모든 창문이 깨져있기도 했다. 깡패처럼 행해지는 이 작전에 뉴타운은 열광한다. 지난 세 달간 순영의 집은 운 좋게 그 손길을 피해갔다. 너저분해진 집의 주인들은 작지만 멀쩡한 순영의 집을 보며 행운의 여신이 살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지붕만 보살피는지. 찬 바람을 먹은 목이 칼칼하다. 평소보다 트인 공기를 마시며 눈을 뜬 순영은 넓게 펼쳐진 전망을 확인하고 목을 억세게 쥐었다. 얼굴이 보라색이 될 때 쯤 손을 놓았다. 머리가 아득했지만 기침을 하면서 잿빛 잔해를 치웠다. 순영은 산소가 부족해 어질했던 그 상태에 대해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 죽음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결론을 내린다.
코너만 돌면 유리 진열대에 화려한 초콜릿이 늘어진 '로지 핑크의 초콜릿 가게'가 나온다. 가자마자 분홍색 앞치마를 입은 뒤, 문 앞을 쓸고…. 반복될 하루에 한숨이 나와 걸음을 멈추고 옆을 스쳐지나간 파스텔톤의 커다란 자동차를 눈으로 좇는다. 씹다뱉은 딸기맛 껌 같군. 저 차를 탈취하고 이 좆같은 뉴타운을 뜨는 상상을 한다. 여러모로 영양가 없는 망상이다. 머릿속에 그려지려던 그림을 흐트러트리는데 딸기맛 껌이 급하게 방향을 바꿔 순영의 앞에 멈춰섰다. 순식간에 문이 열리고 차가 덜컹인다. 분홍색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도 없다.
팔을 끌어당긴 흰 장갑을 거칠게 뿌리쳤다. 어정쩡하게 차 한가운데 널부러져 주변을 둘러본다. 외형보다도 훨씬 크고 넓어 보인다. 문이 있는 면을 제외한 모든 벽에 소파가 붙어 있었다. 자신을 잡아당긴 듬직한 남자 이외에도 백금발을 깔끔하게 묶은 여자와 탁한 장밋빛 머리를 한 어린 남자가 자신을 바라봤다. 죄다 무미건조한 표정인 와중에 장미 남자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순영에게만 어리둥절한 침묵이 지나간다.
"저, 저기요…?"
"영, 빨리. 나 빨리 하고싶어."
"잠시만요, 찾아도 안 나온다구요."
"저기요, 뭐 하시는 건데요."
순영의 얘기를 하면서도 철저하게 순영을 제외한다. 순영이 다시 입을 열려는데 탭을 두드리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연한 갈색 눈이 순영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픽 대상이 아니네요. 조슈아, 실수 했어요."
"뭐? 아냐, 손바닥에 분명…."
"이거요? 그냥 상천데."
검붉은 핏망울이 그대로 굳은 상처를 보여주자 셋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장미 남자, 조슈아의 눈썹은 울 것처럼 처졌다. 청회색 머리가 드디어 돌아가기 시작한다. 순영을 일종의 매춘부인 피크로 오인한 것이다. 급작스럽게 머리를 침범한 깨달음에 순영은 벌떡 일어나다 머리를 박았다. 그새 등이 축축해졌다. 분한 마음이 피를 뜨겁게 달군다. 저기요! 당차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좀 내려주시죠..."
어쩔 수 없다. 부자 앞에선 한 없이 약해지는게 태생적으로 빈곤한 인간의 한계다. 어물쩡 말 끝을 흐리자 울상이던 조슈아가 강아지처럼 순영을 올려다 봤다. 지금보니 눈꼬리가 참 묘하다. 순영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돈 줄게, 나랑 자자."
분명 그 말만 들었을 땐 이럴 생각 없었는데, 순영은 눈 앞의 매끈한 나체로 앉아있는 조슈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침대는 하얗고, 조슈아는 자꾸만 손을 뻗어 순영의 맨 상체를 만지작 거린다. 머리가 지끈지끈.
거절하고 싶었다. 거절하려고 했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금액을 제시한 순간 벽이 생각났다. 무너진 벽 한짝. 어쩌면 행운의 여신이 내게 건네는 사과일지도 몰라.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안 벗어?"
마른 복근을 훑던 손이 바지 버클로 옮겨간다. 서둘러 손목을 잡아보지만 이미 지퍼까지 내려갔다. 착잡하게 바지를 벗자 모든 흥미롭게 바라보던 조슈아가 팔을 당겨 침대로 순영을 이끌었다.
"처음이니까 해주는 거야."
이르듯이 말하곤 순영을 바르게 눕혔다. 순영의 다리 사이로 꾸물꾸물 들어가 몸을 낮춘다. 낡은 속옷을 입술로 물어 내리는 꼴이 능숙했다. 축 늘어진 순영의 기둥을 길게 핥은 조슈아가 눈웃음을 쳤다.
한번에 기둥을 전부 삼키고 혀로 넓게 감싸 올린다. 순영의 숨이 멈추자 조슈아는 하얀 허벅지를 두드렸다. 고른 숨이 느껴지고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린다. 그대로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폭 패인 볼이 야하다. 순영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동그란 뒤통수에 손이 얹어졌다. 퍽 솔직한 반응에 조슈아가 순영을 올려다보며 눈을 접었다. 읏, 야살스런 웃음에 순영이 눈을 피하고 조슈아는 그대로 목구멍을 조여 귀두를 자극했다.
숨을 크게 먹은 순영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옮겨 마른 가슴 근육을 훑는다. 둥근 유륜을 혀로 문지르자 순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뭐, 뭐하는, 말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조슈아는 다시 어깨를 밀쳐 순영을 눕혔다.
"처음이니까, 귀찮긴한데..."
몽롱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입술이 반질반질해 순영은 잠깐 넋을 잃고 조슈아를 바라봤다. 그 사이 조슈아는 순영의 앞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협탁에서 찾아온 분홍색 콘돔을 손가락에 끼웠다. 아우, 잠시 앓는 소리를 낸 조슈아가 손가락을 구멍 속으로 감추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순영의 몸이 침대 헤드에서 멀어졌다. 내가, 박힐 줄 알았는데. 머리가 점점 몽롱해진다.
점점 다가오는 순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슈아는 구멍을 움찔거리며 콘돔에 끼운 두개의 손가락을 놀린다. 어느새 코앞까지 온 순영과 마주친 조슈아의 눈빛은 나른한 와중에 도발적이어서, 순영은 조슈아의 마른 손목을 잡고 척척한 입술에 입을 맞춘다.
"야, 응, 읏.."
가볍게 쥔 손목을 움직이자 능숙하게 순영의 혀를 받아내던 입 속에서 아찔한 신음이 흘렀다. 느릿해진 위와 성급해진 아래의 차이를 조슈아는 저를 닮은 분홍빛 숨소리로 견뎌낸다. 이제, 넣어도 되는데... 공기를 둥둥 떠다니는 목소리가 형체를 찾자 순영의 손이 더 빨라진다. 새 콘돔을 끼우는 손길이 자꾸만 엇나가자 조슈아가 새침하게 손을 뻗었다. 동그랗게 입술에 콘돔을 물고 순영의 성기를 쓰다듬듯 만지작 거린다. 앙 하고 벌린 입으로 기둥을 물고 순영은 재빨리 조슈아를 뒤집었다. 그리고 채워지는 동굴은 순영의 옆에 존재하던 퍼즐같다. 눈 앞에서 튀기는 별빛 속에 순영은 본능을 붙잡았다.
"너무 잘 해!"
지수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핑그르르 돌아가는 핑크빛 가죽 의자에 몸을 늘어뜨린 채. 진한 붉은색의 벽지에는 향긋해보이는 지수의 반신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곳은 조슈아의 스물 두 번째 섹스 공간, 다르게 말하면 조슈아의 접견실. 상기된 얼굴은 아직도 호시와 뜨거운 밤을, 아니... 반나절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지수가 황홀한 표정으로 호시의 훌륭한, 모든 것들을 떠올린다. 도리도리 머리칼을 흔들며 정신을 차린 조슈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소파에 앉은 영을 재촉했다. 보고싶어! 빨리 찾아줘, 영!
"지금 찾는 중이에요."
"이름치면 금방 뜨잖아. 호시, 이름이 뭐 그렇지. 성도 물어볼 걸 그랬다!"
"본명이 아니에요."
"응?"
"누가 돈주고 섹스하는 사람한테 신상을 갖다 바쳐요. 멍청해 보이지 않으니까 그 사이에 떠올린 거겠죠. 조슈아도 피킹할 땐 지수란 이름 안 쓰잖아요."
"아하, 그럼 다른 이름은 뭐야?"
"음, 잠깐만요."
흘러내린 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영은 탭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토독, 몇 번의 두드림이 멈추고 지수는 화면에 뜬 호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순영, 조슈아보다 한 살 어리네요.
"어쩐지, 엄청 팔팔하구... 막..."
"뉴타운 주민이 아니에요. 이건 좀 문젠데."
"뉴타운에 안 살면? 집이 없어?"
"아뇨, 조슈아는 몰라도 상관 없는데... 홀리데이 프로젝트 대상자에요."
"으응, 그.. 회색구역?"
"네."
"나쁜 애 같아 보이진 않던데..."
"그래도 위험해요. 아버지도 싫어하실 테고."
금세 침울해진 지수가 눈꼬리를 떨어트리자 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몽 머리를 몇 번 토닥였다. 그새 오렌지 빛이 돋은 머리칼이 사랑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더 이상 관심 가지시면 안 돼요."
단호하게 말하자 지수의 고개가 수그려졌다. 잠깐 정적이 돌자 영의 손길이 대답을 채근했다.
"Okay..."
"잘 했어요. 전 이제 나가봐야 되니까 패트릭이랑 있어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수리를 확인한 영이 살구색 문을 닫고 나가자 지수는 고개를 들었다. 분홍색 홍조가 올라온 얼굴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탭을 빠르게 두드린 지수는 접견실 빨간 소파에서 자고 있는 패트릭의 너른 어깨를 흔들었다. Pat, 우리 초콜릿 먹으러 가자!
짤랑이며 울리는 종마저도 분홍색인 곳. 순영은 로지 부인이 직접 뜬 스웨터를 입고 예쁘게 진열된 초콜릿을 진열한다. 프레쉬 트리플의 파우더가 날아가지 않게 조심스럽게 상자에 담곤 리본을 달았다. 해피 로즈데이! 포장된 초콜릿을 건네는 순영의 목소리를 정수리 저 끝을 맴돈다. 한껏 밝은 목소리에 새빨간 머리의 남자도 환히 웃으며 목인사를 했다.
조슈아와의 하루로 벽을 고칠 돈을 모두 마련했음에도 순영은 더욱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휑한 광경이 꿈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돈 모아서 뉴타운으로 가게? 옆집의 쇼산나가 담배 연기를 짙게 뿜으며 물어도 순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머리에 불 붙겠다. 흩날리는 탈색모를 하나로 묶어주고 집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가게를 채우는 달콤하고 진득한 냄새는 두통을 일으키지만 깜찍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초콜릿 포장을 부탁하는 핑크빛 인간들을 저주하는 목소리를 절대 내보내지 않는다. 순영은 표정을 밝게 끌어올릴 수록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가게는 여전히 북적였고 순영을 빼곤 모두 꿈결같은 삶을 사는 듯 하다. 잠시 새까만 초콜릿을 바라보다 부드럽게 울리는 도어벨에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
"안녕-"
"조슈아?"
크기 조절이 안된 목소리가 작은 가게를 쩌렁쩌렁 울린다. 쉿, 조용히 해야지. 당황한 얼굴의 순영에게 웃어주며 조슈아는 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앤틱 나무 바닥에 애써 신경을 던지지 않으며 순영의 앞으로 다가간다.
"호시, 아니지, 순영아. 여기 뭐가 제일 맛있어?"
"...조슈아한테는 로즈화이트봉봉이요.."
"응, 그럼 그거 열다섯 세트 주세요. 빨간 리본 달아서!"
일단 일은 해야지. 방싯 웃는 조슈아에 미소를 잃은 순영이 급하게 헬쓱해진 얼굴로 포장을 끝냈다. 빨간 리본을 다는 손이 벌벌 떨리지만 오년의 노하우는 급하게 일어난 수전증에 지지 않는다. 붉은 지폐를 건네받고 나서야 하고싶은 질문을 쏟아냈다.
"왜 왔어요? 어떻게 알았고?"
"음... 언제 끝나?"
"열시요."
"뭐? ...으, 밖에서 기다릴게."
손에 가득 초콜릿 상자를 들고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가게 앞의 풍선껌 대형차를 돌려보내고 가게 앞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은 뒤통수가 처량하다. 연한 분홍색이 이제 막 어두운 푸른빛과 맞닿는 시간이었다. 해는 아직도 낮은 주택의 지붕에 반쯤 얼굴을 내밀고는 조슈아를 맞았다. 오렌지 색이 올라와 상큼해진 머리색이 더욱 노란끼를 띈다.
"저기요, 계산 안 해요?"
"..아, 네, 죄송합니다."
봉봉을 까먹는 조슈아를 넋을 놓고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잡았다. 뭘 신경써. 내 일이나 잘하자. 이마를 콩콩 치며 다짐하지만 머리는 자꾸 이성을 엇나가고, 순영은 평생 받을 면박을 다 받는 것 같았다. 결국은 로지 씨의 사람 좋은 미소를 받아내며 분홍색 스웨터를 벗는다. 한껏 죄송한 포즈로 평소보다 두시간은 이른 시간에 가게 문을 박차고 나왔다.
하늘엔 어느새 손톱만한 달이 하얗게 떠 있었다. 짙은 푸른색으로 변한 밤이 상쾌해 순영은 기지개를 키곤 조슈아의 앞에 쭈그려 앉는다. 적갈색의 벽돌에 기대 꾸벅꾸벅 조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몇개 남지않은 봉봉을 주워먹었다. 엄청 다네, 이걸 계속 먹었단 말이야? 우물거리며 조슈아의 어깨를 흔든다.
"조슈아, 일어나요. 나 나왔어."
"으응, 영이야...?"
"아뇨, 순영이야."
"순영!"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조슈아에 순영이 더 놀라 비틀거렸다. 쭈그린 포즈에서 흔들리다 손으로 까칠한 바닥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깜짝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이번엔 엉덩방아다. 조슈아가 입술을 마주댔다. 남색 공기 속에 별가루가 쏟아진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빛을 그림자로 만드는 입맞춤에 순영은 어설픈 자세로 눈을 감았다.
쪽! 입술이 떨어지고 동시에 터지는 깜찍한 소리에 순영의 귀끝이 붉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에 조슈아가 키득키득 웃는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아직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과하러 왔어."
멍청하게 주저 앉아서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순영이 조슈아는 귀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말랑한 볼따구를 붙잡고 다시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저번에 설명도 없이 섹스-"
"와아!"
"응? 왜?!"
"말을, 순, 순화해서!"
"아, 응. 암튼 갑자기 자자구 해서 미안해."
"아, 아녜요. 저-"
"데이트 신청이 먼전데, 그치."
"네?"
"그래서 말인데... 밥은 먹었어?"
순영은 한 시간 전에 먹은 치즈 오믈렛을 떠올렸다. 아직도 더부룩하게 얹혀있는 계란 찌꺼기가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순영의 입은 어쩐지 그를 무시한다. 아뇨,
"아직 안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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