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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 싸늘한 기운에 원우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기분은 날카로운 날씨 덕에 그대로 굳어버려 풀릴 기미도 없었다. 시동을 거는 손이 몇번이나 엇나갔다. 차창 너머로 병원을 바라보던 원우는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또 다시 연인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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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의 애인이 오랫동안 아파서 몇번이고 병문안을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순애보적인 회방이 아닌, 운명. 원우에게는 저주인 어떠한 운명 때문이었다.
전원우가 사랑하는 사람은 화를 입는다.
우습다. 우습다 못해 동화스러운 얘기였다. 원우도 그렇게 생각했다. 첫사랑에게 천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반장이었던 첫 여자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짝사랑했던 동기가 초기암 판정을 받은 것도 모두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썸이든, 짝사랑이든, 정말 연애든. 원우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뒤면 어김없이 불행이 찾아왔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난 정민마저 병원 신세를 지게됐다. 원우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얘기할 때, 그런게 어딨어,하고 웃던 정민이 씁쓸하게 정말이네,하고 헛웃음을 날렸다. 정민의 웃음에 원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과하는 원우를 정민은 차마 보지 못했다. 이별을 고한 건 정민이었다.
"너는 평생 혼자 살아야겠다."
원우는 시동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에 들어가 끊었던 담배를 샀다. 무얼 즐겨 폈었는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 이름이나 던저 부르곤 밖으로 나와 곧장 불을 붙였다.
대충 고른 담배는 텁텁하고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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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시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초저녁부터 잠에 빠진 원우는 느닷없이 눈을 떴다. 시꺼먼 어둠 사이로 확인한 시간은 다섯시를 살짝 넘겼고, 뻑뻑한 눈은 다시 감길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허공만 보던 원우는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가운 공기가 마지막 남은 잠을 떼어냈다.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에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은 원우밖에 없어보였다. 골목 사이를 걷다 새까만 굴 속으로 들어갔다 육교를 오르기도 했다.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넘칠 듯 출렁이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버스정류장의 불빛을 쫓아 걸었다.
여섯시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원우는 차가운 정류장 벤치에 앉아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출근길이 분명한 깔끔한 차림의 여자와 희끗한 머리의 아저씨, 기대에 찬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학생 둘, 그리고 반듯하게 서 있는 마른 몸의 청년 하나. 통학하는 학생인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가방이 없는데, 영양가 없는 고민을 흘려보내던 원우는 뒤늦게 남자가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 눈을 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시간이 흘렀다. 점점 곤란해지는 얼굴을 무표정하게 마주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지. 원우는 남자와 마주보는 얼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앞까지 가까워진 남자의 앞에서 원우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 혹시 저한테 할말이라도."
원우가 멍한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자는 걱정스럽게 원우를 살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버스가 지나갔다. 뿌연 가스 사이의 원우는 무력감을 느꼈다.
■
생명, 한 사람의 목숨. 그가 그 가벼움에 대해 깨달은 것은 겨우 열다섯이 될 무렵이었다. 무릎꿇은 상처투성이는 별 어려움 없이 쏟아지고 조각나고 사라진다. 그의 손으로 앗아간 생명의 증거는 한차례 비가 쏟아지면 사라질 진한 피비린내, 종종 바닥을 보며 걸을 때나 돌바닥 틈으로 보이는 말라붙은 핏자국 정도였다.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네, 그럼."
미소를 짓는 대비의 입가로 인자한 주름이 패였다. 원은 애써 웃음을 띄우며 마주 인사했다. 가증스러운 여인이다. 본래 띄던 지혜와 오랜 궁궐 생활로 쌓인 처세술은 어린 왕의 목을 조르곤 했다. 얼추 십년 정도 되는 시간동안 원이 어떤 욕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이정도 였다. 경차관 정도의 취급으로 자꾸만 원을 궐 밖으로 돌리는 것. 짧은 인사를 마치고 붉은 난여에 올라탄 원은 한숨을 쉬었다. 욕심은 없었지만 신경쓸 것이 너무도 많았다. 대비의 눈 밖에 나면 아차하는 사이에 절명이 가까워지는 꼴을 너무 많이 본 탓이었다.
왕의 것이라고 하기엔 단촐한 행렬을 군중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정도 규모야 하루걸러 하루 보는 양반들의 것과 다를바가 없었다. 원도 익숙하게 요란한 시장바닥을 구경했다. 사람사는 꼴 다 똑같다는데, 원은 쉽게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지 못한다. 싸구려 기름 냄새가 풍기는 거리는 원에게 늘상 어색했다. 왁자하게 떠드는 사람들도, 아이들이 지나가면 훅하고 올라오는 흙먼지마저 원이 공감하기엔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새롭거나 흥미롭지도 않았다. 이런 거리로 내몰린 것은 궐에서의 원의 입지가 좁다는 반증이었다.
다음에는 말을 타고 나와볼까. 태평한 생각을 하며 눈을 끔뻑였다. 정말이지 별거없는 순시가 될 것 같다는 예상을 하는 순간 원우의 눈으로 벚꽃이 들어온다.
"멈추어라!"
원우의 외침에 순식간에 행진이 정지했다. 겸사복장 순영이 말에서 내려 놀란 얼굴로 난여를 살폈다. 웬만한 일로는 순시 중에 입을 열지 않는 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순영의 물음에도 조용히 원은 순영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조그만 얼굴이 뭐가 그리도 환한지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겼다. 내리깐 눈은 가느다란 속눈썹으로 덮여 사르르 움직이고 덩달아 입꼬리도 묘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너무도 정적인 웃음에 원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듯도 했다.
"전하, 전하. 전- 야, 원."
"어? 아, 큼. 왜 그러느냐."
"정신 차리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저기, 저 사람."
없다. 잠깐 순영에게 시선을 돌린 사이에 원의 넋을 빼놓은 여인이 사라졌다. 원을 보는 순영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작게 미간을 좁힌 원이 입을 달싹댔지만 방도가 없었다. 결국은 순영을 물리고 다시 행렬을 이어나갔다. 지루한 노정동안 사라진 얼굴은 원의 머릿속에서 잔뜩 굴러다녔다. 온통 유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숫보드라운 얼굴. 어디서 봤던 것인지. 원은 입술과 함께 기억을 곱씹는다.
■
짧게 끝날리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원의 일행은 늘 묵는 기방인 청연방으로 향했다. 고생한 말단들이 가장 풀어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고, 덕분에 원을 향한 감시가 줄어드는 공간이기도 했다. 술냄새와 옅은 향기가 방으로 흘러들어오면 원은 눈을 뜨고 조용히 발을 옮겼다. 시끌벅적한 창호지 너머는 무시하고 향하는 곳은 적막한 쪽마루였다. 이 곳에 앉아있노라면 새까만 밤이 무색하게 기분이 화해지곤 했다. 넓게 펼쳐진 연못에 달이고 별이고 흘러가며 원과 장난을 치고 퍽 따사로와진 밤공기가 어깨를 감싸주는 것이다.
바쁘지 않을 적이면 원을 안쓰럽게 보는 행수와 담소를 나눌 수도 있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행수의 털털한 위로가 없는 밤은 시원섭섭하다. 몸을 젖히고 새하얀 달을 올려다보는 원은 그 어느때보다 편안했다. 아예 등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코끝으로 기방으로 이어진 강물냄새와 텁텁한 흙냄새가 났다. 그 사이로 스며든 화사하고 은은한 향기. 낯설다. 원우는 눈을 떴다. 방금 전과 다른 풍경, 하얀 달이 아닌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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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바람에 흩날린 온기가 모여 봄이 되고, 봄은 더위를 뒤집어 쓰는 시기가 된 것이다. 겨울의 끝물, 새벽 버스정류장에서 그 무거운 눈으로 지수를 붙잡은 원우 덕에 지수는 타야할 버스를 세번 정도 보내버렸고, 원우는 멍청하게 눈을 끔벅이며 지수를 카페로 인도했다. 얼떨결에 생겨버린 인연에 지수는 당황스러웠지만 늘상 짓는 미소만 지었다. 자신의 행동에 영문을 모르던 원우는 그런 지수에 알 수 없는 당위성을 얻는 기분이 들었다.
둘은 어질어질 연락을 이어나갔다. 불분명한 목적으로 성사된 만남들은 성공적이었다. 사르르 웃는 지수를 보며 원우는 분명히 만족감과 설렘, 그리고 왠지 모를 그리움마저 느꼈다. 애써 외면하는 중이었다. 남자니까, 사랑은 아닐 것이다. 꽉 막힌 편견은 원우의 자기 위안을 도왔다. 한밤 중 지수의 휴대폰에서 걸려온 전화만 아니었더라면, 그 외면을 지속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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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도 원우와 마찬가지로 술을 즐기지 않았다. 그런 지수가 술을 먹고 뻗었다, 하는 이야기는 느릿한 원우마저 달리게 했다. 급하게 문을 열어젖힌 주점은 옅은 소란이 묻어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지수를 찾는 원우에게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원우씨, 여기."
지수의 친구 아니랄까봐, 웃는게 환한 남자가 아는체를 했다. 남자의 건너편에는 테이블에 엎어진 지수와 그를 둘러싼 서넛의 무리가 있었다. 무리를 제치고 지수를 업은 원우가 간단한 목례를 끝으로 가게를 나왔다. 초면에 굳은 표정만 보였지만 가장 신경쓰이는 것은 지수였다. 다행히 지수는 원우의 등에 몸을 늘어뜨린채 미동도 없었다.
마른 몸이 깨나 무게가 나갔다. 집에 도착한 원우는 땀까지 뻘뻘 흘렸다. 조심스레 침대에 지수를 올려놓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까지 확인했다. 일단은 푹 젖은 몸을 씻어야 했다.
왜 자신을 불렀을까, 에 대한 의문은 풀린지 오래였다. 원우에게 업히고도 몇번이나 원우의 이름을 웅얼거렸으니. 잠금도 걸려있지 않은 지수의 휴대폰에서 원우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 지수는 왜 원우의 이름을 되뇌였을까. 이상하게 실소가 나왔다. 기분이 좋은건가. 이상하게 녹아내리는 마음에 원우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얼굴로 흐르는 찬물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이래서는 안된다. 코끝으로 싸한 병원의 향이 스치는 듯 했다.
■
불빛이 새어나오는 문 앞으로 검은 인영이 발을 멈췄다. 큼, 작게 소리를 내자 얕은 어둠 속에서 갓끈을 묶던 원이 문을 쳐다봤다. 익숙한 기척에 다시 갓끈으로 신경을 돌린다.
"무슨 일인가, 겸사복장."
"안 됩니다."
뻔하다. 원은 짧게 혀를 차고 대꾸했다.
"잠시 뿐이다. 어차피 너도 동행할 것 아니냐. 별일 없게 하겠다."
"그래도 안 됩니다."
단호한 순영의 태도에 원은 헛웃음을 쳤다. 흑립을 눌러썼다. 평범한 양반처럼 도포까지 싹 갖춰입은 원우가 순영을 향해 돌아봤다. 날카롭게 굳어진 얼굴이 일순 움찔한다. 얼굴만 안 굳히면 참 말랑한 친군데. 매끈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다.
"권순영."
"야이, 안 된다니까?"
"오늘따라 심하네."
"애초에 이랬어야 했어."
다시 단단해진 표정은 풀어질 생각이 없다. 안 먹혀? 원은 노선을 변경했다. 한숨을 쉬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순영은 치여사는 왕을 불쌍하게 바라보곤 했다.
"순영아. 한번만 부탁하자."
"-마지막이야."
원이 조용하게 미소를 지었다. 친구 좋다는게 뭐냐니- 아무것도 없다- 순영이 투덜거리며 나가는 길을 원 역시 발소리를 죽여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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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라고 하기엔 허름한 구멍을 지나자 들뜬 기운이 감돌았다. 노랫소리와 가야금 소리, 히히덕거리며 잔뜩 섞여 노니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원은 빛이 퍼지는 방향으로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차가운 뒤뜰, 강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가볍게 귓가를 두드렸다. 어느새 순영은 저 멀리 아름드리 나무 아래 걸터 앉아있었다.
강 너머를 바라보는 동그란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결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새 고개를 들어 소복한 웃음을 쌓는다. 달빛에 드러나는 윤곽이 부드러웠다. 원도 엉덩이를 대고 앉아 조금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허공을 가르며 장난스레 움직이는 다리가 멈췄다.
"웬일로 먼저 손을 잡으십니까."
"그러는 홍은 웬일로 신이 나 보입니다."
"술을 조금, 마셨더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말투가 나긋나긋 늘어지고 있었다.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허허 웃으며 얼굴을 들여다 보니 하얀 달빛을 받은 것 치고 얼굴이 붉었다. 맞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볼을 쓰다듬으려다 다시 강가로 눈을 돌리는 얼굴에 머쓱이 손을 내렸다.
홍은 늘 이런 식이었다. 온통 비밀투성이에 다가오는 모든 것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러면서 짓는 웃음이 얼마나 상냥한지 밀려난지도 모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감싸는데에 능한 사람이었다. 남을 감싸안는 동시에 자신을 꼭 감싸 몸을 숨겼다. 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몇꺼풀에 비밀에 하나하나 손을 대고 싶어졌다. 그렇게 만드는 것 역시 홍의 재주였다. 원은 느리게 손을 펼쳐 달아오른 볼을 감쌌다. 왠지 먹먹해지는 목에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입을 맞춰도 되겠소."
말없이 깜빡이는 눈에 원은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원이 뱉은 말의 이해가 끝났는지 홍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 결국 끄집어낸 말에 원은 탄식을 했다.
"아…. 알고 계실 수도 있지만. 저- 남자입니다."
"-무슨 소리오."
"당연히 아실 줄 알아서, 어-."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에 원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딱히 거절의 말은 아니라는 것을 위안 삼아야 하는 것일까. 원은 어느새 깍지가 풀린 나머지 손을 들어 홍의 다른 쪽 볼을 감쌌다.
홍이 다른 판단을 할 새도 없이 입술이 마주쳤다. 부드럽게 부벼지다 떨어지고 다시 맞붙는다.
완전히 붉어진 두 얼굴이 멀어지자 원은 드디어 웃음을 터트렸다. 영문도 모르고 원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원이 낮은 웃음을 멈추고 홍을 또렷히 마주했다.
"그 커다란 손부터 가려야 여인이라 생각할 것 아니냐."
"-아."
"다른 데서는 목소리 때문에 말도 잘 안하는 것 같더니 내 앞에서는 말도 잘 하고."
"갑자기, 입을 맞추신다기에."
민망한 듯 고개를 그 큰 손안에 푹 떨어트리고 중얼거렸다.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원까지 덩달아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괜히 목을 만지작거리며 큼큼, 거친 소리를 냈다.
사위가 조용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리서 울리는 소음도 섞여 있었다. 긴장 섞인 집중을 풀자 풀벌레 소리도 들렸다. 마음이 느긋해졌다. 홍의 허술한 모습을 보니 드디어 홍이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우습지만, 홍의 투명한 장막이 조금 얇아진 기분이었다. 말없이 다시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에 힘을 준 원이 전에 없던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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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미롭게 퍼지는 캐논 변주곡. 핸드폰 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가 중요한 연락을 놓친 뒤로 원우는 최대한 시끄럽지 않은 음악에 지수 전용 벨소리를 맡겼다. 카톡 알림음은 깜찍한 까톡-에서 피아노의 미플랫, 그러니까 가장 거슬리지 않는 단음으로 해놓았다. 이 치밀함은 모두 지수의 연락을 단칼에 거절할 배짱이 없다는걸 공통의 이유로 삼았다. 휴대폰에 '지수형'이 뜨는데 어떻게 거절 버튼을 끌고 올 수 있겠는가. 의외의 순애보는 마음도 약한 것이었다.
처음 연락을 끊은 일주일은 반응이 없었다. 그저 잠시 바쁘겠거니 하는 태평한 얼굴이 눈에 그려졌다. 그러다 종종 보내는 카톡에도 원우가 답이 없자 잘 하지도 않는 전화를 걸어댔다. 자꾸만 울리는 피아노 소리에 원우는 속상하고, 힘들고, 음- 기분이 좋았다.
지수는 늘 느긋하게 굴었다. 원우도 겉보기에는 그랬겠지만 지수는 그마저도 신경에 들이지 않는 듯 했다. 그런 모든게 원우를 안달나게 했고, 망할 저주에 지수가 발을 들이지 않게 하기 위해 갑작스레 연락을 끊었을 때도 사실은 지수가 신경쓰지 않으면, 연락이 끊겼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다. 내심 알아주길 바랬던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부드러운 선율이 끊기고 얼마 안돼 평범한 벨이 울렸다. 한창 지수 생각에 넋을 놓고 있던 원우가 별 생각 없이 폰을 집어들었다. 액정을 귀에 갖다 댄 순간 지수형이 다른 사람 번호로 건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튀어올랐고 슬픈 예감은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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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는 얼마 전 정민을 만났다. 다행히 정민의 병은 짧게 명을 다했고 정민은 이게 다 원우가 더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팔팔해진 얼굴이었다. 원우가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라 치면 능청스럽게 말을 빼앗으며 되려 수척한 원우의 꼴을 놀려댔다.
"너 막 네 자신을 사랑하게 됐냐? 나르시시스트?"
아이스 커피를 쭉쭉 빨며 한다는 말이 그랬다. 원우가 헛웃음을 치자 얼굴을 굳혔다.
"장난 아니고. 무슨 일 있어?"
"좀, 너까지 아프고 나니까 진짜 혼자 살아야 하나 싶어서."
"글쎄.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네 저주 이겨낼 강철 인간."
"그 사람 하나 찾자고 다른 사람들 아프게 할 순 없잖아."
"그럼 무당 찾아가 볼래? 사주 봐."
"…봤어."
나지막히 대답하는 원우에 정민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 진짜 전원우. 정민의 흐느낌을 외면하며 안경을 고쳐썼다. 아닌 척 해도 꽤나 민망해 하고 있었다.
"그래서, 뭐래."
"그, 나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대."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전생?"
"시작이 오래 돼서 인연이 길대. 엄청 많이 만났다고… 나도 다는 못 알아 들었어."
"너도 어지간히 힘들었나 보다. 그런 델 다 찾아가고."
너만 하겠냐. 마음 속 걷히지 않은 죄책감은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대충 머리를 만지작 거리며 몸을 늘어트리자 정민이 질문을 덧붙였다.
"거기서 전생은 안 알려줬어? 그사람 누군지는?"
"응."
"그럼 뭐 어쩌냐. 혼자 살아."
호탕하게 던지는 말에 다시금 분위기가 유해졌다. 원우는 웃으면서도 정민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진실을 털어놓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원우의 머릿속에는 희미한 조각이 오래된 기억처럼 떠올랐다.
■
마지막은 무슨,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순영의 타박에도 원은 청연방으로 향하는 발길을 끊지 않았다. 대비의 눈총을 피하겠다고 할 일을 헐레벌떡 끝내는 가벼운 표정에 순영이 제재를 가하는 것도 한계였다.
원은 본래 밤을 싫어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구질구질한 망령 뿐이었다. 자신이 끊어버린 생에 죄책감을 버린지는 오래 되었지만 돌 틈에 끼인 말라붙은 핏자국 처럼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더욱이 밤의 기억이라면 좋은 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밤에 어딜 가시는 겝니까."
아, 순영의 몸이 화드득 굳는 것이 보였다. 살벌한 대비가 궁녀 몇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입을 연 것은 원이었다. 태연함을 가장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밤마실을 가려던 차 였습니다."
표정변화는 없었지만 대비는 원의 대답을 가소롭게 여기고 있었다. 원을 위아래로 훑는 눈은 밤마실 의상, 에 대한 딴지를 충분히 걸 수 있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원이 다시 입을 열려하자 대비가 손을 들어 말을 가로챘다.
"전하. 전하가 막 즉위했을 때 기억나십니까."
"네, 남평 문씨 가문이 반역을 일으켰던. 딱 열해가 지났군요."
"맞습니다. 전하께서 손수 반역자들을 처단하셨지요."
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때 손에 묻은 미지근한 피가 몸을 타고 오르는 기분이었다. 열 여섯의 원에게는 가혹했으리라. 잔인한 풍광보다는 그 당시 원이 느꼈던 불쾌한 감정이 다시 살아나는 게 역했다. 저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대비의 생각도 알 수 없어 머리가 아팠다.
"요즘 그에 관한 소문이 돌아서 하는 말입니다. 도망친 손자가 있었다는 군요. 풍산 홍씨 가문의 아들 사이에서 나온, 왕가의 핏줄입니다."
풍산 홍씨, 라고 하면 대비의 친척 일가 중 하나였다. 홍, 이라. 떠오르는 얼굴을 재빨리 지워버렸다. 그저 이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원이 입안 살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들리는 얘기로는, 어느 기방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는데. 조심하셔야겠습니다."
"-기방, 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벌써 의금부에서 수색을 시작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대비마마에게 심려 끼칠 일 없도록 해야겠군요. 이렇게 직접 우려의 말씀을 하게 만들어 송구스럽습니다. 이런 밤에 마주치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죠."
정중하고 잔잔하게 전해진 말이었지만 날카로워진 원의 눈빛에 대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굳이 찾아와서 말을 전하는 꼴이 어색하다는 걸 원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날이 쌀쌀하니 얼른 들어가시는게 좋겠습니다."
"네, 전하도 밤마실- 잘 다녀오십시오."
밤마실이라, 우습기도 해라. 가벼운 인사를 하고 원을 지나치는 대비의 입가에 명백한 비소가 걸려있었다. 원의 이가 뿌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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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을 나서자 찬바람이 볼을 할퀴고 지나갔다. 예의상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냉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복잡한 머릿속에 신경을 쏟지 않기 위한 걸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날씨에도 군말없이 그 찬 못가에서 원을 기다릴 얼굴. 그 비밀스럽고도 해사한 얼굴이 눈에 눈물처럼 어른거렸다. 원은 이성의 비명을 무시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아, 오셨습니까."
작게 인기척을 내자 미소를 띄운 홍이 곧장 눈을 맞춰왔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달빛이 비친 연못마냥 맑게 웃는 홍의 눈을 원은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원이 손을 뻗어 홍을 일으켰다.
"바람이 차다. 들어갈 곳은 없겠느냐."
"저 끝방이 제 방입니다. 따라오시지요."
발소리를 죽이고 향한 방은 손바닥만한 쪽방이었다. 순영을 문 밖에 앉혀두고 둘이 들어가도 대충 가득차는 모양새였다. 왜 자꾸 밖에 나와 있나 했더니. 원우가 설핏 나오려는 웃음을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억눌렀다.
자리를 잡고 앉자 침묵이 흘러내렸다. 원이 말없이 어두운 얼굴을 하니, 홍도 덩달아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주변을 느리게 둘러보던 원이 홍의 얼굴에서 눈을 멈췄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갑자기 던져진 묵직한 질문에 홍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은 여진히 느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네가 누군지 아느냐."
눈도 깜박이지 않는 홍의 표정은 애매했다. 조금 뒤에야 질문의 연유를 알아 챈 건지,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물었다. 원은 허탈한 숨이 입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안다. 원도 자신이 유치하게 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홍은 역모는 커녕 나른하게 목숨을 부지하는데 행복해 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잘못이라고는 역모를 일으킨 자의 피를 담고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오래되고 어설픈 업 때문에 원은 울컥이는 가슴을 삼켜야 했다.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나- 알고도 모른척 했던 것인가- 뻔한 답이 튀어나왔지만 원은 눈을 감았다. 홍은 속으로 남을 비웃을 사람도, 악의를 품고 기만할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알 수 없는 감정이 원을 휘둘러댔다. 그렇게나 굽히고 싶지 않던 대비에게 농락당한 것에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었다. 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홍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원이 문고리를 잡자 홍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가 흩어지고, 방 안의 어두운 소란은 금새 잊혀졌다. 홍은 고개를 묻었다. 빛이 사라지고 사위가 검게 내려앉았다.
□
"…일찍 왔네."
얼굴도 보지않고 건네는 인사가 덤덤했다. 원우가 늦은 편은 아니었다. 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서성이며 보낸 시간을 더해도 약속 시간인 세시 까지는 십분이나 남아있었다. 다만 반쯤 투명해진 커피가 지수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생각에 빠진 시간을 증명해줬을 뿐이었다.
"응. 오랜만이야."
퍽 부드러운 말투와 표정이었지만 원우는 지수가 화가 났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내는 방법조차 모르는 것이었다. 뭐라 말을 붙이려다 마땅한 소재를 찾지 못해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불안하게 비벼댔다.
"혹시, 내가 실수한 거 있어? 술 마신 날. 너 부른거 사과할게."
"아무일도 없었어. 괜찮아."
"근데 왜 내 연락만 씹어…?"
"-형."
"나는, 너랑 잘 되가는 줄 알았어. 너도- 날 좋아하는 줄 알았어. 내가 널 좋아하는 것처럼."
눈썹이 팔자가 되어 우물우물 하는 말에 원우는 혀로 입술을 쓸었다. 입을 열면 목구멍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
"미안해. 나는 형 그렇게 생각한 적-."
"나도 미안해. 사실 네 친구들 만났어."
"뭐?"
"찾아간 건 아니고, 길에서 만났어. 나 알아보길래 같이 밥 먹었어. 그리고 네 얘기 들었어."
"…"
"날 좋아해?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힘껏 눌러뱉는 말은 또렷하고 또 어느정도 빛나서 원우는 또다시 말을 잃었다. 어떤 새끼가 그걸 말하고 다녔는지 색출해내던 머릿속이 지수의 눈으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형, 잠깐만."
"응, 아니로 대답해. 날 좋아해?"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곧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눈을 뜨자 잔잔한 눈빛이 다시 나타나고 지수는 커피잔을 쥐었다.
"…응, 좋아해. 형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거침없이 질문하던 기세는 어디가고 원우의 입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볼이 달아올랐다. 눈은 깜빡이고 입은 벙긋거렸다. 고장난 것 같네. 원우가 소리없이 웃자 그제야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어- 그래! 맞아!"
"뭐가 맞아."
"네가 날 좋아하는게 맞아. 아니, 아니, 맞았어. 맞았던 거구, 그래."
"그래도 난 형이랑 연애는 못 해."
"왜!"
"형도 들었다며."
"원우야, 너 이미 나 많이 좋아하잖아."
얼씨구. 원우는 아직도 홍조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직구를 날리는 지수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일까 싶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수를 못 본 동안 애틋함이 커졌는지 지금 지수와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 꿈만 같았고 아까 지수가 던진 '내가 널 좋아하는 것처럼.'에는 머리가 멍해지기까지 했으니까. 그래도 애써 무던한 척 말을 넘겼다.
"허, 계속해 봐."
"너 나랑 만난게 2월이니까, 벌써 우리 칠개월 넘게 알고 지냈거든?"
"그렇지."
"솔직히 너 나 만났을 때부터, 아, 그건 아니라 쳐도 너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뭐하는 거야. 유치하게."
"잘 생각해 봐."
"한, 4월 쯤인가."
"헐."
또 다시 붉어진 얼굴에 원우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또 왜."
"아, 난 여름부터인 줄 알았지."
"계속 얘기해 봐."
"암튼, 그럼 네가 날 좋아한게 다섯 달 정도 됐잖아."
"그렇지."
"근데 난 멀쩡해!"
바싹 탄 목에 지수의 밍밍해진 커피를 가져다 빨던 원우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지수를 쳐다봤다.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게 무슨 논리에요."
"네 친구들이 너보고 저주받았다는게, 엄청 짧게 만나도 그렇게, 음-."
"알았어요. 잠깐 생각할 시간을 좀 줘요."
지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원우의 그- 저주는 매우 빠른 시간 안에 나타났고 원우가 마음을 버리면 빠른 시간 안에 모습을 감추었다. 보통은 삼개월 안에 시작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알아. 원우야."
원우가 망설이는 눈빛을 하자 지수가 덥썩 원우의 손을 잡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에 입꼬리도 예쁘게 휘어있었다.
"내가, 너의 마지막이야."
□
젖은 머리를 털던 원우가 피식 웃음을 떨어트렸다. 내가, 너의 마지막이야- 오글거리는 말을 던져놓고 제풀에 화드득 열이 오른 지수가 다시 떠오른 탓이었다. 옳은 선택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붉어진 얼굴로 환하게 웃는 지수의 얼굴은, 어쩐지 원우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오늘의 지수는 어쩐지 신기했다. 항상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미소만 짓다가 꽤나 필사적인 얼굴을 했으니, 원우 입장에서는 역시 기분좋은 일이었다. 지수를 사랑하게 된 뒤로 점점 유치해지는 것 같았다.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냉장고를 열었다. 이유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맥주캔을 바라보며 망설이던 원우의 뒤로 초인종이 울렸다. 이 밤에, 누가.
"어… 하루만 재워줄 수 있어?"
체인이 걸린 문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걸쳐있다. 익숙하다기 보다는, 겨우 몇시간 전에 본 얼굴. 지수가 머쓱하게 웃자 원우는 말없이 문을 열고 지수를 맞았다. 같이 사는 동생이 친구들 데려온다고 했는데 잊어버렸어. 근데 마침 네가 근처에 살잖아. 혹시나 해서 와봤지. 신발을 벗으며 조잘대는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간 지수와 달리 원우는 현관에 그대로 서 지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꽤 깔끔한 집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지수가 뒤따라오지 않는 기척에 몸을 돌렸다. 원우는 잠깐의 고민에 빠져 그런 지수를 멍하니 보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오늘은 손만 잡고 자자."
"응? 뭐라고 했어?"
"아니야. 씻을거면 옷 빌려줄게."
금방 쏟아지는 물소리가 울리고 원우는 침대에 등을 기댔다. 의식하지 않으려해도 자꾸만 허허실실 웃음이 나왔다. 지수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가장 먼저 찾는다 생각하자 신기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상하게 심장이 아파왔다.
■
비난할 수 없었다. 책망할 수 없었다. 원은 차가운 밤을 걸으며 뜨겁게 올라오는 울음을 삼킨다. 다른 말 없이 홍의 방을 떠난 것은 자신을 속인 홍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원은 홍을 미워할 수 없었다. 홍의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했다고, 오히려 그렇게 생각했다.
상처받았을 것이다. 늘 유순하게 행동했고, 원의 감정에 응할 때 마저 그랬다. 마찬가지였다. 원의 커다랗고 매서운 감정 역시 홍은 고요하게 품고 그 조각을 살포시 뱉은 것이었다. 사랑한다면 믿어달라는 이야기를 무참히 부숴버린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너지는 몸에 순영이 급하게 원을 부축했다. 차게 식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휩쓸리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대비의 손짓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꼭두각시가.
원은 그 날 이후로 밀회를 그만두었다. 홍을 다시 볼 낯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신이 찾아가면 위험해지기도 하고, 이미 대비가 눈치를 챈 이상 대비의 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지는 얼굴엔 무거운 기운이 흘렀다.
지켜야할 것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키고 싶어지자 금새 약점이 되버렸다.
원은 깊숙히 가라앉아 홍을 생각했다. 오밀조밀한 얼굴, 커다란 손, 조용히 날아가는 숨소리까지. 원은 종종 순영을 보내 홍의 안위를 확인했다. 옮긴 거처는 괜찮은지, 먹을 것은 충분한지, 여전히 잠들지 못하는지. 홍이 보낼 미래까지 고민했다. 그를 위협하는 자는 누구이며, 위험할 상황은 어떻게, 언제, 오는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
모든 것은 조용히, 그리고 또 조용히 이루어졌다. 소리없이 다가가야 그녀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원은 평소 어떤 의미로든 낌새가 있던 자들을 조사해 소수만 끌여들였다. 소극적인 진행을 막으려 직접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들은 원과의 직접적 접촉없이 진전상황을 알렸다.
원은 대비에게 전에 없이 복종했다. 그녀의 심기가 거슬리지 않게, 홍을 걱정하느라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굴었다. 머리를 조아리며 눈에 띄지 않게 칼을 가는 것이었다.
"실수가 있으면, 그때는…"
원은 그 날을 떠올렸다. 왕이 되고 처음으로 목도한 참극, 원에게는 혹독한 신고식이자 홍에게는 몇백겹의 눈물이었다. 이젠 쉽게도 사라지는 목숨만을 떠올리지 않는다. 눈물을 쏟아내던 눈이 움직임을 멈추고 굳어버린 순간을, 흐느낌을 뱉던 입술이 차갑게 말라버린 순간을 하나하나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깃털같던 생명이 뼈를 깎는 죄악감으로 다가왔다.
익숙하다 느끼던 감정도 사라졌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공기와 그 틈을 파고든 피비린내에 둔해졌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흔한 그 장면들에 홍이 들어감으로 온통 아픔의 기억이 된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모두가 죽소."
날짜가 정해졌다. 이 달 보름, 벚꽃이 만개한 봄 밤 이었다.
□
"맥주?"
욕실에서 나오는 지수에게 차가운 맥주캔을 들어보였다. 지수가 술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정쩡한 분위기에는 알코올이 제격일 것 같았다. 같은 생각이었는지 지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 몇개를 까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연락이 끊긴 동안의 일을 말하던 지수가 취기가 오르더니 원우를 노려보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늘어진 혀로 우물우물대는 꼴이 술에 제대로 빠진 것 같았다.
"너는 진짜, 바보야. 갑자기 나만 막 무시하고…. 나 완전 섭섭해따? 나는 네 친구들도 잘 모르잖아. 물어볼 사람도 없었고, 속상하다 말할 데두 없구우. 너랑 너무너무 멀어진 것 같았어."
"…그랬구나. 미안하네."
"응. 그래서, 네 친구들이랑도 친해지려구우. 도망가려고 하면 묶어놓으라고 하게."
"내가 도망갈 일이 뭐가 있어."
"항상, 항상 그랬지! 이번도 그렇고, 옛날에도. 날 안 보면 끝나는 것두 아닌데, 너무 겁이 많어어."
"옛날?"
"응 옛나알, 아주, 아주, 옛날에…. 그동안은 나도 널 기다리기만 했는데- 너무 힘들어써…."
"무슨 소리야. 제대로 얘기해 줘."
"그냐앙 내가 널 그만큼 사랑한다안! 그런 얘기이-"
말끝을 흐리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마친 지수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넋을 놓고 지수의 말을 해석하던 원우는 한숨을 쉬었다. 지수의 술주정 속 이야기도 이상했지만 더 이상한 것은 지수의 이야기를 듣자 오래된 기억이 머릿속에서 술렁인다는 거였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늘어져 잠에 든 지수를 대충 부축하고 침대로 옮겼다. 깨우지 않으려 조심히 움직였지만 역시 한계가 있었다. 침대에 등이 닿자 나른한 눈이 떠졌다.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은 얼굴이 슬퍼 보였다. 물기어린 눈을 한 지수가 손을 들어 자신을 내려다 보는 원우의 뺨을 감쌌다.
"그래도, 이번엔 내가 잡았어."
갑자기 또렷해진 목소리에 원우가 당황하는 사이 지수는 몸을 살짝 일으켜 입을 맞췄다. 지수의 감은 눈 사이로 떨어진 눈물이 흐릿한 길을 남기며 턱에 맺힐 쯤에야 원우도 지수의 볼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
짙은 키스가 이어졌지만 원우는 다시 지수를 눕히고 침대를 정리했다. 금새 골아떨어진 지수가 낮은 숨소리를 냈다. 달이 밝아 지수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밤에는 쓰지 않던 커튼을 쳤다. 어두워진 방을 조용히 나서자 그제야 원우는 편히 숨을 쉬었다.
키스 내내 눈물을 흘리던 지수를 생각했다. 왠지 모르게 아릿한 심장께를 붙들게 만드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입술이 떨어지자 속삭이던 말. '너를 용서해 줘.' 화장실에 들어간 원우는 그제야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보름달 아래 대비는 형형한 웃음을 지었다. 흩날리는 벚꽃잎이 무색하게 원의 칼날은 형편없이 부서졌고 부서진 칼날은 그대로 주인에게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니까, 원의 작전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댓가는 원의 가장 소중한 것, 대비는 제대로 된 본보기를 계획했다.
화창한 봄날 연분홍 벚꽃이 시뻘건 색으로 물들고 원은 초조하게 홍의 안위를 걱정했다. 순영을 내보낼 처지가 못 되는 것 역시 섣부른 움직임으로 인한 결과 중 가장 가벼운 하나였다. 대비 암살에 동조한 관리들의 일가가 처형당하고 있었다. 원은 사그러드는 생명들을 보며 입술을 터트렸다. 그리고 역시나 홍을 생각했다.
"이제 주동자를 끌고 오너라!"
대비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주동자, 주동자는 원 그 자신인데. 원은 운 나쁜 희생자에게 사죄의 기도를 올리려 눈을 감았다. 순영의 손이 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기 전까지 말이다.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할 필요는 없을것이라. 원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한 결말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 초연한 눈과 앙다문 입에서 시선을 돌리고 거짓이라 믿고 싶었다. 몸이 무섭게 떨렸다. 목 앞에 칼이 들어와도, 화살이 심장을 뚫고 지나가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잠시 기다려라."
"무슨 일이십니까."
"내… 친히 내릴 말이 있다."
흔들리는 목소리에 튀어나오는 대비의 만족스러운 웃음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원은 무릎꿇은 홍에게 다가갔다. 다리가 후들거려 몇번이나 주저앉을 뻔한 것을 순영이 일으켰다. 비틀대는 걸음이 홍의 앞에 멈추자 홍은 원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죄 생채기가 난 얼굴로, 자신의 잘못은 없음을 알면서도 의연하게 웃었다. 원에게 평화롭게 웃어보였다. 나지막히 건네지는 말 역시 평소와 같았다. 그럼에도 원은, 당연히도 원은…
울음을 삼키며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 있어도 눈 앞이 흐려 홍의 마지막 따위는 보지 못했으리라. 홍의 마지막 마디 역시 홍다웠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은 그러지 못했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삼키는 침이 독이었고 내쉬는 숨이 악이었다. 사랑이 눈을 멀게 만들었다 생각했다. 멋대로 사랑해버려서 내 손으로 홍을 죽이고 말았다.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여라. 너는 사랑하는 모든 자를 불행하게 만드리라.
스스로를 저주했다.
자신에게 저주를 내렸다.
홍의 용서가 소용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저주했다.
억만겹의 저주를 내렸다.
□
여의도엔 사람이 꽃보다 많대.
지수의 얘기에 원우는 계획한 벚꽃놀이 장소를 수정했다. 바뀐 장소는 원우네 아파트 단지 안 정자. 도시 속 정원으로 기획해 벚꽃이 꽤 흐드러지게 핀, 그럼에도 사람은 별로 없는 원우만의 명소였다. 실망할 법도 한데 지수는 더 유쾌하게 웃었다. 저녁은 좋은데 가자. 미안한 듯 말하는 원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자에 나란히 앉아 의미 없지만 즐거운 말들을 주고 받았다. 퍽 다정하게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도 하고 손을 마주잡고 장난을 치기도 했다. 바람이 불때마다 벚꽃잎이 정자를 감쌌다. 종종 동그란 머리 위로 사뿐히 내려앉으면 우습지도 않으면서 소리내어 웃으며 후후 불어댔다. 원우가 정자 안까지 흘러들어온 조그만 꽃잎을 눈으로 좇았다. 덩달아 원과 시선을 같이한 지수는 고개까지 휙휙 돌아갔다. 원우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떴다.
"예전엔 벚꽃이 싫었는데."
빙그르르 돌아간 꽃잎이 맞잡은 손, 지수의 손등에 떨어졌다.
"벚꽃을 보면 슬펐거든, 왠지 모르게."
조심조심 손을 들어 꽃잎 위로 입술을 부볐다. 지수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이제는 아니야?"
"응, 이제는 아니야."
원이 고개를 들자 입술에 꽃잎이 붙은 채였다. 입을 가리고 웃던 지수가 동그랗게 눈을 뜬 원우의 입술에 다가갔다. 그건 사실-
"내가 널 다시 사랑하기 때문이야."
입술이 닿을듯 말듯 숨이 섞이는 곳에서 지수가 소근댔다. 종종 이렇게 알다가도 모를 소리를 한다. 원은 익숙해진 이상한 얘기에 그저 입꼬리를 올렸다. 입을 맞춘 둘 사이로 다시 한번 꽃잎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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